정치 불확실성에 신음하는 경제
지난 20일 경북 포항 영일만항에서 50km 떨어진 해역에서 대왕고래 프로젝트 시추선 웨스트 카펠라호가 ‘탐사 시추’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 16일 오전 부산 남외항에 정박중인 웨스트 카펠라호 위로 일출이 떠오르는 모습./김동환 기자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1460원을 돌파하며 요동치는 가운데 환율 외 내수, 수출, 노사 전망 등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주요 항목에서도 일제히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내수 경기의 척도로 불리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내년 1월 치가 5년 만에 최대 낙폭(落幅)으로 떨어졌으며, 부정적인 전망도 역대 최장인 34개월 연속 이어가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 경제 성장의 86%를 책임지는 수출 역시 13대 주요 품목 중 6개가 정체나 하락으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특히 ‘트럼프발(發) 관세 장벽’까지 현실화할 경우 대미(對美) 수출에서만 20조원 이상의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국책 연구원 발표도 이날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2기 출범에 탄핵 정국까지 겹친 극심한 불확실성 속에 ‘한국 경제’는 조타수도 없이 2025년으로 무작정 나아가는 형국”이라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더 어두운 내년도 내수 전망
26일 한국경제인협회는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 대상 조사에서, 내년 1월 경기 전망치가 약 5년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내년 1월 종합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가 84.6으로, 전월(97.3) 대비 12.7포인트 줄었다는 것이다. 2020년 4월(25.1포인트 하락) 이후 4년 9개월 만의 최대 하락 폭이다. BSI가 기준치인 100보다 높으면 전월 대비 경기 전망이 긍정적이고, 낮으면 부정적이라는 뜻이다. BSI는 2022년 4월 이후, 34개월 연속 기준선인 100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한경협이 1975년 1월 조사를 시작한 이래 역대 최장 기간이다.
조사 항목은 총 7개인데, 내수 88.6, 투자 89.4, 고용 90.0, 수출 90.2, 자금 사정 92.1, 채산성 94.0, 재고 104.9 등 모든 항목이 부정적이었다. 재고는 다른 항목과 달리 기준선 100을 넘으면 재고 과잉을 뜻한다. 내수는 52개월, 수출은 51개월, 투자는 21개월 만의 최저치였다. 대한상공회의소도 이날 소매유통업체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내년 소매 시장이 올해 대비 0.4% 성장에 그칠 것으로 집계됐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2020년 코로나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응답 업체의 66.3%가 내년 유통 시장을 부정적으로 봤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비 심리 위축(63.8%)이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이미 장기화된 내수 침체가 새해에도 쉽게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는 소매유통업계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전광판에 표시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오른쪽)과 코스피 지수. 이날 환율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1460원을 넘어섰다. 원 달러 환율이 요동치면서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주요 항목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전기병 기자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통하는 노사 관계에 대한 새해 전망 역시 암울한 결과가 나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회원사 150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69.3%가 내년 노사 관계가 올해보다 더 불안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최근 민주노총이 탄핵 국면에서 정치 파업 성격의 총파업을 결의하는 등 움직임을 보이는 데다 기업마다 구조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노사 갈등이 더 커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다.
◇트럼프발 변수에 수출도 경고등
내수 부진 속에서 그나마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수출에도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이날 트럼프의 관세 부과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를 적용해 추정한 결과, 우리의 대미 수출은 9.3~13.1%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대미 수출액이 1157억달러(약 169조730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최대 22조원의 수출이 감소할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후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 관세를, 중국산 제품에는 60%의 추가 관세를 매기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앞서 한국무역협회는 한국의 13대 수출 품목 가운데 절반가량인 6개 품목이 내년에 사실상 정체나 역성장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석유제품(-7.9%), 석유화학(-0.5%)을 비롯해 반도체의 빈자리를 메워왔던 수출 2위 품목 자동차(-1.9%)마저 내년에는 마이너스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간 부진했던 반도체도 내년에는 소폭 상승이 예상되지만,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이외에 범용 제품은 가격 하락 가능성이 점차 커지며 이마저도 불투명한 상태다. 산업연구원 김정현 전문연구원은 “보편 관세 효과는 단순히 관세 장벽으로 인한 수출 감소에 그치지 않고 기업들의 생산 기지 해외 이전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순찬 기자 ideach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