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戰 된 AI 칩 전쟁
사우디와 UAE까지 참전
한국이 인공지능(AI) 두뇌 역할을 하는 ‘AI 칩’ 확보에 실패하면서, 국가 과학기술 연구의 핵심 자원인 국가 수퍼컴퓨터 도입이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글로벌 빅테크를 비롯해 주요 국가들까지 참전한 AI 칩 확보가 한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좌우하는 안보 문제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선 한국도 AI를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정부는 당초 내년 도입 예정이었던 ‘국가 수퍼컴퓨터 6호기’의 도입 일정을 2026년 상반기로 변경했다. 6호기는 AI 연산에 특화된 GPU(그래픽처리장치)를 주력으로 하는 첫 수퍼컴으로 총 2929억원의 예산에 입찰 공고를 냈지만, 지난해 네 차례 모두 응찰자가 없어 유찰된 탓이다. 그러는 사이 수퍼컴 5호기는 시스템 사용률이 최대 90%에 달할 만큼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과학자들의 신청을 모두 소화하지 못해 일부 연구자는 해외 기관의 수퍼컴을 쓰는 것으로 전해졌다. 홍태영 KISTI 슈퍼컴퓨팅인프라센터장은 “지난해 챗GPT 열풍으로 AI 칩 공급 대란이 벌어지면서 가격이 뛴 데다, 환율까지 오른 탓”이라고 했다. 부랴부랴 예산을 53% 증액한 4483억원으로 다시 책정했지만, 정부 안에서도 여전히 100% 확보를 자신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세계 각국까지 나선 AI ‘쩐의 전쟁’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AI 칩 확보전은 AI 경쟁이 소위 ‘쩐의 전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대표적인 AI 칩인 미국 엔비디아의 H100 가격은 개당 5000만원 수준이다. 최근 공개한 첨단 블랙웰(Blackwell) 칩도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주요 빅테크와 국가들까지 확보에 나서면서 시장가가 더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국가 차원에서 AI 칩 경쟁에 나섰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를 만큼, AI 칩 확보는 국가 안보전으로 변한 상황이다.
그래픽=김성규
전 세계는 AI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제히 돈을 쏟아붓고 있다. 미 스탠퍼드대의 ‘AI 인덱스 리포트 2024′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AI 민간 투자로만 672억2000만달러(약 94조5000억원)를 투입했다. 2위 중국(77억6000만달러)의 9배 수준이다. 한국의 민간 투자는 지난해 세계 9위 수준인 13억9000만달러(약 2조원)에 그쳤다.
그래픽=김성규
미국 월스트리트에선 AI 투자에 목마른 기업들의 수요를 파악해 ‘AI칩 담보 대출’이란 새로운 상품까지 내놨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블랙스톤·핌코·칼라일·블랙록 등 월가 금융기관들이 지난해부터 AI 클라우드 업체들에 AI칩을 담보로 대출해준 돈은 110억달러(약 15조5000억원)에 달한다. 기업들은 대출금으로 다시 AI 칩을 사며 투자를 이어나가고 있다.
“AI·클라우드, 국가 전략 기술 지정... 적극 투자 필요”
업계에선 ‘AI 3대 강국(G3)’을 공언한 한국이 AI 투자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5일 SK가 주최한 ‘AI 서밋’에서도 국내 주요 AI 기업 대표들이 나와 이 같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는 “현재 산업계·학계에서 제일 필요한 건 GPU를 보다 싸고 안정적으로 받아내는 것”이라며 “기업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국가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신아 카카오 대표도 “이제 한 기업이 1조~2조원을 투자하기도 어렵고, 국가가 다 힘을 합쳐도 8조원 이상의 GPU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며 “GPU나 IDC(인터넷 데이터센터) 확보는 국가 경쟁력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재계에선 정부가 AI와 그 운영 기반인 클라우드를 국가 전략 기술로 지정해 세제 혜택 확대 등 본격적인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와 같은 국가 전략 기술로 지정되면 대기업 기준으로 R&D(연구개발)에 30~40%, 시설 투자에도 15%의 세액 공제가 적용된다. 이미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은 AI를 국가 핵심 기술로 선정해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AI·클라우드가 반도체의 뒤를 잇는 새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도록 투자를 이끄는 마중물이 절실하다”고 했다.
박순찬 기자 ideach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