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조 정보·인맥 시장서 일어나는 일
워싱턴 DC의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동서 방향으로 쭉 뻗은 도로의 이름은 K스트리트다. 길이 6.4㎞의 이 도로를 중심으로 워싱턴에서 가장 밀도 있는 정보와 인맥이 모인다. 유명 로비 업체들과 로펌, 컨설팅 업체, 회계법인 등이 몰려 있는 일명 ‘로비의 거리’라서다. 각국 정부와 기업을 대리해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활동하는 로비스트들이 이곳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중엔 미국과 갈등하는 중국 기업을 대리하는 로비스트들도 적지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동영상 공유 플랫폼인 틱톡의 모회사인 바이트댄스는 지난해 미국에서 로비 활동비로만 874만 달러(약 117억원)를 썼다. K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여다봤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한국 대기업들도 로비 전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로비자금 공개 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올 상반기에만 로비 자금으로 사상 최대치인 354만 달러(약 47억원)를 썼고, 현대차는 171만 달러(23억원)를 지출했다. 두 회사 모두 최근 수년간 반도체공장과 전기차 공장 등을 미국에 새로 짓는 등 대미 투자 규모가 수백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 로비가 불법인 한국에선 기업들의 ‘로비’가 낯설다.
◆6조원짜리 정보·인맥 시장=미국에선 국민의 청원권(국민이 국가기관에 희망사항을 진술할 기본권)을 명시한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로비 활동이 보장된다. 실제 미국의 정책 결정, 입법 과정에서 로비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기업뿐 아니라 각국 정부도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로비 업체와 로비스트를 큰돈을 들여 고용하고 있다. 한국 외교부도 2022년 예산 20억원 이상을 들여 미국 로비업체 5곳으로부터 자문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박경민 기자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로비 규모는 42억7000만 달러(약 5조7098억원)로 집계됐다. 로비 규모를 공개하기 시작한 1998년(14억5000만 달러)과 비교하면 약 3배가 됐다. 다만 오해하지 말 게 있다. 한국에선 ‘로비금’이라고 하면 ‘뒷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집계되는 로비 액수는 대부분 기업이나 외국 정부 같은 고객이 로비 업체 등에 로비를 맡기고 지급한 비용을 말한다. 즉 42억7000만 달러는 지난해 미국에서 활동한 로비 업체 등이 기업이나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금액의 총액과 가깝다. 참고로 오픈시크릿은 로비 금액을 임의로 산출하는 게 아니라 미국 의회·정부가 공식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계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활동한 로비스트는 총 1만2939명이다. 1996년 1월 발효한 미국의 로비활동공개법(Lobbying Disclosure Act)에 따르면 로비 활동을 위해 업무 시간의 20% 이상을 쓰는 개인과, 로비스트를 한 명이라도 고용한 기관은 미 상·하원에 이를 등록해야 한다. 미국은 로비를 허용하는 대신 투명하게 그 활동을 공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들의 주 타깃은 의회와 정부다. 미국에선 로비를 ‘제3원’(상원·하원·로비) 또는 ‘제5부’(입법·사법·행정·언론·로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송 그 후 “로비가 중요하더라”=미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대기업 A사는 제품 생산을 위한 원재료 수급에 종종 애로를 겪는다. 일부 화학물질의 경우 미국 환경보호청(EPA) 등 연방정부의 수입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길어지면 고객사의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서다. A사는 이럴 때 로비스트를 활용한다. 로비스트는 공장이 위치한 주 의원에게 e메일을 보내거나 대면 미팅을 통해 도움을 구하고, 해당 의원은 연방 정부에 수입 허가 일정을 당겨줄 것을 요청한다. 로비를 통해 수개월이 걸릴 수 있는 허가 과정을 대폭 줄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A사 관계자는 설명했다.
신재민 기자
요즘은 한국 기업들도 미국에서 로비에 익숙해졌지만, 그 역사는 길지 않다. 한국 기업들의 대미 로비는 미국에서 치른 소송전과 궤를 같이한다. 그 시작은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 전쟁이었다. 애플은 2011년 4월 미국 법원에 스마트폰 디자인과 특허를 침해했다며 삼성전자를 제소했다. 당시 로비 지출액을 보면 삼성은 제소 당시 로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2011년 삼성전자 미국 법인의 로비 지출액은 1만 달러밖에 안 됐다. 그해 애플은 로비로만 226만 달러를 썼다.
결국 2012년 8월 미국 법원은 삼성전자가 애플의 디자인 특허와 실용 특허를 침해했다며 삼성전자가 10억5185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삼성전자는 2012년엔 로비액을 7만6000달러까지 늘렸지만, 너무 늦은 조처였다. 분기별 지출액을 보면 1·2분기 통틀어 1만 달러만 지출하다가 판결이 임박한 3분기에 2만7000달러로 지출액을 늘렸다. 이 소송전은 7년간 진행됐다. 삼성전자의 로비액은 2018년엔 391만 달러까지 늘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현 SK온)의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계기로도 로비액이 크게 늘었다.
◆미국 우선주의는 로비를 부르고=로비가 소송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트럼프 정부 이후 미국 우선주의가 현실화하며 미국은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기업들에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들의 신규 대미 투자는 1138억 달러(약 150조원)에 달했다. 워싱턴이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대가 된 것이다. 특히,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이 시행되면서 보다 유리한 사업 조건을 확보하려면 정·관계에 ‘끈’을 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로비에 실패하면 막대한 손실이 생길 수 있다.
박경민 기자
대표적인 사례가 IRA 보조금 지급 대상 전기차에서 현대차·기아 차종이 제외된 일이다. 이후 현대차는 성 김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를 자문역으로 위촉하고, 글로벌정책실(GPO)을 ‘사업부’ 급으로 격상하는 등 해외 대관 조직을 강화했다. 반대 사례도 있다. 미국 정부를 설득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에 대한 미국 장비 반입 금지 규제를 1년 유예한 경우다.
신재민 기자
11월 미국 대선을 앞둔 요즘 한국 기업들은 어느 때보다 바쁘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올 상반기 대미 로비 자금으로 354만 달러를 썼다. 지난해 상반기 322만 달러 대비 9.9% 증가했는데, 역대 최대치다. 올 상반기 고용한 로비스트는 58명이다. 지난해 연간으로는 630만 달러를 썼다. SK그룹은 올 상반기 254만 달러를 미국 내 로비에 지출했는데, 지난해 상반기(227만 달러) 대비 11.9% 늘었다.
일본 기업들은 1980년대부터 대미 로비에 투자해 왔다. 미 철강회사 US스틸을 인수하려던 일본제철은 미 정치권의 반대에 부닥치자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부 장관을 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전 장관을 즉각 고문으로 영입했다. 유혜영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이나 정부에는 미국 정치와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제대로 아는 전문가가 없는 것 같다”면서 “로비스트로 전관을 쓰더라도 이름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현직 의원, 고위 관료와 실제로 커넥션이 있는 사람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