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전략 비축’이 글로벌 화두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정부 차원에서 비트코인을 매입해 부채 관리에 활용하고 디지털자산 패권을 강화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다. 각국 정부도 바빠졌다. 중국·러시아·브라질·스위스·체코·독일 등 수많은 나라에서 비트코인 비축이 ‘국가 의제’로 떠올랐다.
한편에서는 ‘트럼프의 허풍’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실현 가능성은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비트코인 전략 비축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더라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반대하면 실상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회의론이 나온다.
전략 비축 여부는 지금으로선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미국이 실제 비축을 시작한다고 가정하면, 패권국 사이에서 치열한 ‘비트코인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진단이다. 과거 미국-소련이 우주 산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던 것처럼, 비트코인을 둘러싸고 현대판 ‘우주 경쟁’이 재현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비트코인 비축, 미국이 얻는 것은?
부채 리스크 상쇄…‘달러 패권 강화설’도
포문은 미국이 열었다. 비트코인 전략 자산 비축을 주장해왔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의회도 힘을 싣고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미국 선거에서 대통령 당선과 함께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주도권을 가진 덕분이다.
신시아 루미스 공화당 상원의원이 발의한 ‘비트코인 법안(BITCOIN Act)’이 대표적이다. 향후 5년 간 매년 비트코인을 20만개씩, 총 100만개 매입해 전략 준비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 골자다. 미국 Fed가 잉여금 계정으로 보유할 수 있는 미국 달러 총액을 감축하고, 매년 순이익의 일정 금액으로 비트코인 매입을 요구하는 안도 담겼다.
미국이 비트코인 전략 비축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여럿이다. 먼저, 비트코인 가치 상승에 따른 여러 리스크 헤지(회피·분산)다. 물가 상승과 부채 증가에 따른 부담을 비트코인 보유로 상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반에크는 미국이 100만개 비트코인을 전략 비축할 경우 2049년까지 국가 부채 35% 감축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비트코인 가격이 우상향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전략 비축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주도하는 국가 간 경쟁이 가격을 끌어올릴 것으로 낙관한다.
기존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에도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은 현재 딜레마에 빠져 있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외로 달러 유동성을 지속 공급해야 한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하에서 무역 흑자를 추구할 경우, 달러 유동성은 되레 미국으로 빨려 들어온다.
비트코인 예찬론자는 비트코인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각국 정부가 비트코인을 전략 자산으로 보유하려 한다면, 기존에 달러로 보유하던 자산 일부를 팔아 비트코인으로 대체하는 수요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지 않고도 달러 유동성이 전 세계에 풀리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비트코인 본위제’ 시대가 열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과거 금 보유고가 금융 시장 안정에 기반이 됐듯, 향후 디지털 금융 시대에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비트코인 보유가 선결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국가별 비트코인 도입 논의, 어디까지
중국·러시아 이어 브라질·스위스·체코도
주변국에서도 비트코인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에 이어 전 세계 비트코인 보유국 2위인 중국 내부에서도 최근 미국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 국채 보유량을 줄이는 대신 금을 사들이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금 수요 중 일부를 비트코인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국제금융에서 소외된 러시아 역시 비트코인으로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배제했다. 달러 결제가 원천 차단된 상황에서 그동안은 해외 교역 시 중국 위안화를 활용하거나 밀무역을 기반으로 버텨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비트코인을 대체 결제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 브릭스(BRICS)를 중심으로 코인 결제 시스템과 채굴 인프라 강화 방안을 제안하고, 향후 코인을 무역 결제 자산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마련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 제재에 맞서 다른 형태의 지급결제 수단을 고려해야 한다”는 발언과 함께 “(달러와 달리) 누가 비트코인 사용을 막을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비트코인 도입 논의를 진행 중인 국가는 이 밖에도 많다. 브라질은 최근 국제 준비금 5%를 비트코인에 할당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폴란드 대통령 후보인 스와보미르 멘첸은 당선 시 비트코인 준비금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캐나다 밴쿠버는 최근 시 재정 운용에 비트코인 활용 방안을 논의 중이다. 세금과 수수료를 비트코인으로 받고 시 유보금 일부를 비트코인으로 보유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스위스는 비트코인을 의무 비축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놓고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10만명 서명을 받는 데 성공할 경우 국민투표로 연방법을 개정한다. 찬성이 더 많으면 스위스 중앙은행은 법에 따라 비트코인 비축금 포함을 의무화하게 된다.
비트코인 전략 비축, 회의론도
의회 통과해도 Fed 거절 시 ‘무용지물’
비트코인 전략 비축을 둘러싼 회의적인 시선도 물론 존재한다. 특히 ‘비트코인 비축 시 달러 패권이 강화될 수 있다’는 의견을 놓고 ‘난센스’라고 주장하는 이가 많다. 소중한 달러를 태워 사들인 비트코인이 정작 오르지 않을 경우, 미국 입장에서 워낙 리스크가 크다는 게 근거다. 지난해 12월 제롬 파월 Fed 의장이 “Fed는 비트코인을 소유할 수 없다”고 밝힌 이유도 여기 맞닿아 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이 과거 원유를 전략 자산으로 비축한 건 달러 패권 강화가 목적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원유라는 자산을 원하고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이 강화된 건 그 결과일 뿐”이라며 “원유처럼 전 세계가 비트코인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이 없는 현재, 미국이 사들인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진다면 달러를 허공에 뿌린 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설령 비트코인 비축 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하더라도 남은 절차가 많다. 미국 재무부 승인을 거쳐야 하고 독립 기관인 Fed에서 비트코인 매입 실탄용 달러를 내어줘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과 교수는 “전략 비축 기대감에 비트코인이 크게 오르긴 했지만 실제 이행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며 “경제통인 트럼프 대통령이 비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는, 오히려 Fed에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지지층을 결집하고 중국 등 경쟁국에 혼란을 주려는 목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처: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