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환승 시대
400조 퇴직연금 시장에서 머니무브(자금 이동) 움직임이 감지된다. 기존 퇴직연금을 해지하지 않고 다른 금융회사로 갈아탈 수 있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지난달 말 시행되면서다.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권과 수익률을 앞세운 증권사 간 환승고객 잡기 총력전에 돌입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가 시작된 10월 31일, 한 증권사에서 홍보물을 부착하는 모습. [연합뉴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 시행으로 은행권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달 말 실물이전 제도 시행 후 일주일 만에 주요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 잔액이 감소세로 전환하면서다. 5일 기준 주요 시중은행 5곳(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합산 퇴직연금 잔액은 179조2330억원으로 지난달 말 179조2901억원보다 571억원 줄었다. 주요 은행 퇴직연금 잔액이 줄어든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다만 시행 초기인 데다, 일부 은행에서는 퇴직연금 적립금 잔액이 늘어난 곳도 있어 흐름을 예단하기는 이른 상황이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는 퇴직연금 가입자가 보유하고 있는 상품을 다른 금융사로 옮길 때 고객이 보유 중인 상품 그대로 이전할 수 있는 서비스다. 기존에는 다른 금융사로 퇴직연금 계좌를 옮기려면 운용 중인 상품을 전부 팔아 현금화해야 이전이 가능했다. 이 과정이 번거로울 뿐 아니라 중도해지 등에 따른 일부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실물이전 제도 시행으로 이러한 부담이 최소화된 것이다.
보험사, 보험계약 묶여있어 이전 제한
현재 퇴직연금 시장을 주도하는 곳은 은행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400조878억원이다. 이중 은행권의 퇴직연금 적립 규모가 210조2811억원이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52.56%를 은행이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를 증권사(96조5328억원)와 보험사(93조2654억원)가 나눠 갖고 있다. 성장세는 증권사가 두드러진다. 증권업계의 지난 1년간 퇴직연금 증가율은 19.8%를 나타냈다. 보험업계(6.7%)는 물론 은행권(15.6%)보다 높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금융권에선 실물이전 서비스 시행으로 은행권의 잔액이 감소하고, 증권사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보험사의 경우 퇴직연금 적립금의 약 80%가 보험계약으로 묶여 있어 사실상 실물이전이 제한된다. 이에 퇴직연금 가입자를 뺏고 지키기 위한 전쟁은 은행과 증권사의 양강 구도로 압축되고 있다. 최근 증권업계의 약진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에 있다. 지난해 증권업계의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7.11%다. 은행은 4.87%, 생보 4.37%, 손보 4.63%로 전체 평균(5.26%)을 밑돈다. 올해 3분기도 증권사 평균 수익률은 원리금 보장형이 4.48%, 비보장형이 11.49%로 가장 우수했다. 증권사 라인업 중엔 20~30대 MZ세대가 선호하는 상장지수펀드(ETF)도 많다. 증권사 퇴직연금에서 취급하는 ETF는 약 770여 개로, 은행과 증권사의 100여 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증권사는 이번 실물이전 제도를 기회로 퇴직연금 영토를 넓히려는 목표가 뚜렷하고, 퇴직연금 잔액 규모가 큰 은행은 굳건한 입지를 지키려는 수성 전략을 펴고 있다. 현재 은행·증권업계에는 경품 이벤트가 넘쳐난다. KB국민은행은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에 가입하면 선착순 스타벅스 커피쿠폰을 주고, IBK기업은행은 신세계상품권을 제공한다. NH농협은행도 개인형 IRP 이전 완료 고객을 대상으로 스타벅스 디저트세트를 준비했다. 미래에셋·한국투자·KB증권·삼성증권 등 대형 증권사들도 실물이전 고객을 대상으로 상품권 지급 행사를 쏟아내고 있다. 일각에선 ‘최대 103만원’ 지급 이벤트가 등장하면서 과열 우려를 빚기도 했다.
시장의 관심은 가입자 유치 경쟁이 과연 ‘머니무브’로 확산되느냐다. 머니무브의 물꼬는 금융당국이 텄다. 경쟁을 통해 국민의 노후 발판이 될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실물이전 제도는 당초 지난달 15일 시행 예정이었지만, 준비 부족으로 2주 늦춰 시행됐다. 그나마 삼성생명과 하나증권, 부산·경남은행, 광주·iM은행과 iM증권 등 7개사는 연기된 시행일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원리금보장 상품 편중 등 과제도
이런 문제 등으로 실물이전 제도 초기에는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만한 격변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환승 가능한 퇴직연금 대상에도 제한이 있다. 예금·펀드·ETF 등 대부분의 상품이 이전 대상에 포함되지만 디폴트옵션(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이나 보험계약 등은 이전이 어렵다. 금감원 관계자는 “시행 초기라 수치를 공표하기는 어렵지만, 개인형퇴직연금(IRP) 중심으로 이전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상품권 마케팅이 과열되는 상황을 두고도 쓴소리가 나온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이사는 “퇴직연금 서비스나 수수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일시 이벤트에 따라 옮긴다면, 가입자나 업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보다 근본적인 퇴직연금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사들은 지난해 퇴직연금 수수료로만 1조400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도 낮은 수익률 제고를 위한 대책엔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퇴직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은 1.6% 미만으로 과도하게 원리금보장 상품에 편중돼있다. 남재우 자본연 연구위원은 “전문가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 가입자의 관심 증대도 필수적이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퇴직연금 수익률이 높은 회사로 이전해도 개인의 수익률은 수백 가지 상품 중 어떤 것을 어떤 시기에 선택했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우선 퇴직연금이 잘 운용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투자 성향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