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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오래 한 미국인은 은퇴를 반긴다. 은퇴가 무서운 한국인과는 상황이 크게 다른데, 이는 일하지 않아도 걱정 없이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80%가 넘는다. 은퇴하면 나오는 연금으로만 일할 때의 80% 넘는 소득이 생기는 셈이다. 한국의 연금 소득대체율은 50%도 안 된다.
연금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배당이다. 주식에 투자한 뒤 그 배당수익으로 노후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주주자본주의가 정착한 미국에서는 기업이 배당에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배당수익률이 연 12%가 넘기도 한다. 배당소득에 부과하는 세금도 높지 않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정반대다. 기업은 배당에 인색하고 배당소득에 대한 세금은 높다. 그러다 보니 배당을 통해 수익을 낸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기업이 배당에 인색한 건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한국의 배당수익률은 바닥권이었다. 2000년 이후 회사채 수익률과 배당수익률의 추세를 보면 배당수익률은 금리 변화에 상관없이 1%대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2013~2022년 10년간 한국의 평균 주주환원율은 29%로 주요국 대비 낮다(KB증권 조사). 주주환원율이란 기업이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쓴 돈을 순이익으로 나눈 비율이다. 미국은 한국의 3배인 92%,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은 68%였다. 신흥국(38%)과 중국(32%)조차 우리보다 높다. 낮은 주주환원율의 절반은 배당 부족이 이유다.
우리나라는 배당 성향(당기순이익 중 현금으로 지급된 배당금 비율)이 전반적으로 낮다. 금융위원회 등이 지난 2022년 1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 배당 성향은 19.14%다. 대만(54.85%), 영국(48.23%), 독일(41.14%), 프랑스(39.17%), 미국(37.27%) 등과 대조된다. 그런데 이게 2000년대 이후 문제가 아니다. 중앙일보 1996년 11월 15일 자 29면에는 ‘대기업 배당 인색하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배당수익률은 세계 36개국 중 33위였다. 한국 기업은 왜 이렇게 배당에 인색한 걸까. 짐작건대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글로벌 수출 시장에서 중국·일본 같은 강력한 경쟁자를 제치고 승리하기 위해 한국 기업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야 한다. 그런데 투자 성과는 2~3년 뒤에나 나타난다.
더구나 투자금 대부분은 10년 이상의 기대 수명을 가진 내구재다. 결국, 한 번 투자를 잘못하면 파산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끝없는 투자 경쟁, 그리고 파산의 위험 앞에서 기업은 어떤 선택을 할까. 번 돈을 배당으로 유출하는 대신 최대한 보유하려 할 것이다. 이것을 두고 배당수익률이 낮으니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한국 기업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익이 늘어났거나, 늘고 있는데도 배당에 인색한 경우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이 경우 투자자는 해당 기업 이익이 늘어나고 성장하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의문에 빠지기 쉽다. 빠르게 성장하고 또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기업에 투자자가 몰리는 이유는 결국 ‘기업 성장이 주가 상승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감 덕분이다.
그런데 이익이 늘어나도 배당에 인색하다면, 이 회사에 투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업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에 관한 관심이 낮을 수밖에 없다. 또 시장에서 부각되는 테마와 이 회사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지 등에 관심을 더 가질 것이다. 2022년 태풍 ‘노루’가 한반도에 접근할 때, 이름이 비슷한 페인트 회사의 주가가 급등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배당은, 증시가 붕괴할 때 ‘저가매수’의 기반을 제공해 주가를 방어하기도 한다. 예컨대 A기업의 주가가 1만원이고 연간 200원의 배당금을 지급한다고 가정해보자. A기업의 배당수익률은 2%다. 그런데, 불황으로 매출이 떨어지더라도 200원의 배당을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주가 폭락은 되레 저가매수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A기업 주가가 5000원으로 떨어질 때 배당수익률은 4%가 되기 때문이다. 4%의 배당수익률이면 웬만한 회사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이다.
만일 여기서 주가가 더 내리면 배당 투자의 매력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 기업이 배당을 전혀 하지 않거나 배당을 자주 중단하는 기업이라면? 이 회사의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진다면 아마도 손절매(loss-cut) 주문이 쏟아질 것이다. 이게 배당의 힘이다. 특히 연기금 같은 장기투자자는 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기에, 배당금을 지급하는 기업에 장기 투자하고 배당을 재투자함으로써 복리 성과를 누리려고 한다.
배당수익률을 끌어올려야 연기금 같은 장기투자자를 늘릴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기업의 인색한 배당은 증시의 변동성을 높이는 결정적 요소라 할 수 있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장기적 성과’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드는 데다, 연기금 등 장기투자자의 저가매수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 요인에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한국 증시는 만년 저평가 신세를 벗어나기 힘들 수 있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