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에 따른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 하고 있다. 이제는 시장에서 심심찮게 1500원 돌파 전망을 찾아볼 수 있는 가운데 실제로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다면 금융 시장은 물론 국내 경제 전반에 미칠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3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오전 2시 전장 서울환시 주간 거래(오전 9시~오후 3시 30분) 종가(1467.5원) 대비 4.8원 상승한 1472.3원에 마감했다. 다만 전날 주간 거래 종가(1472.5원)보다는 0.2원 하락했다. 환율은 주간 거래 종료 뒤 글로벌 강달러 영향에 1475.0원까지 오르면서 일 중 고점을 찍기도 했다.
올해 4분기 평균 환율(일일 종가 기준)은 1398.75원으로 집계됐다.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1분기(1418.3원) 이후 15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보다 더 높았을 때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분기(1596.88원) 정도다.
분기 평균 환율은 올해 1분기 1329.4원에서 2분기 1371.24원으로 올랐다가 3분기 1358.35원으로 하락했으나 4분기에 1400원 부근까지 반등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이달 비상계엄 사태 후 정치 불안이 확산하면서 원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영향 때문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매파적' 금리인하에 나서면서 내년 금리인하 횟수를 기존 4회에서 2회 줄인 점도 원화 약세를 부추겼다.
올해 주간 거래 종가(1472.5원)는 연간 종가 기준으로 1997년(1695.0원) 이후 2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기도 하다. 이제 시장에서는 환율 최상단을 1500원으로 바라보는 전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까지 환율이 1500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비쳐 충격을 안겼다.
KB증권 오재영 연구원은 "향후 환율 상방은 정치적 이벤트의 전개에 달렸을 것"이라며 "2025년 연준의 금리인하 속도에 대한 불확실성, 트럼프 정권 출범 이후 미국 정책 불확실성 등이 부각 시 1500원대 초반까지도 오버슈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추가 상단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하나증권 전규연 연구원은 "2025년 상반기 환율은 미국 예외주의, 트럼프 집권 2기 무역분쟁 심화로 추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며 "트럼프 취임 직전 환율의 시작점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2025년 환율 경로가 달라질 것이며 환율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내년에 1500원대 환율도 열어둘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NH투자증권 권아민 연구원은 "대내 정치 불확실성이 환율의 단기 변동성을 높이는 상황"이라며 "베이스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추가 탄핵 현실화, 외국인 자금이탈 현실화 시 1500원 돌파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KDI도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3~4%의 환율 변동은 통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원·달러 환율의 1500원 도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환율이 상승가도를 달리면서 연말 기업들이 재무제표를 작성할 때 적용되는 환율도 덩달아 높아지게 됐다. 일반적으로 환율이 오르면 달러 표시 자산과 부채에 반영되고 수익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원자재 수입 비중이 높은 철강이나 건설 업종은 환율 상승이 비용 압력을 높여 수익성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수출 비중이 높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은 환율 상승이 단기적으로 수익성에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부담을 안게 된다.
특히 환 헤지 인력을 따로 갖추지 않은 중소기업들의 피해가 막심할 수 있다. 국내 중소기업의 90%는 중간재를 수입한 이후 가공해 대기업에 납품하거나 해외에 판매하고 있어 고환율에 더 취약하다. 산업연구원은 환율이 10% 오를 때 대기업은 영업이익률이 0.29%포인트 떨어지나 중소기업은 환율이 1%만 올라도 영업이익률이 0.36%포인트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외환보유액 감소에 대한 불안감도 문제다. 환율이 시장의 전망대로 1500원까지 올라선다면 외환 당국이 외환보유액을 헐어 공격적인 환율 방어에 나설 수 있다. 현재까지 당국은 이미 기조적으로 자리 잡은 강달러, 국내 정국 불안,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 악화 등을 고려해 적극적인 개입은 하지 않고 있다. 시장에 달러를 풀어 환율 상승세를 눌러 봤자 외환보유액만 낭비하고 원화 강세 전환 효과는 거두지 못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말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153억9000만달러로 지난 2021년 10월(4692억1000만달러) 역대 최대를 기록한 뒤 이후 3년 동안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왔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난 2022년 5월 이후 지난달 말까지 300억달러 이상 줄었다.
외환보유액 4000억달러는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4000억달러가 깨지면 1997년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경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상황이다. 2018년 5월에도 외환보유액 4000억달러가 무너진 적이 있으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내수와 수출 상황이 모두 좋지 않다는 점에서 특히 우려가 크다.
이달 말 외환보유액은 내년 1월 6일 오전 중에 발표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8일 오후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앞으로도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 계속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 조정)을 할 것"이라면서 "외환보유액이 4000억달러 밑으로, 4100억달러 밑으로 내려가는 정도는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최근 환율이 급등 후 급락을 반복하는 움직임이 자주 나타나면서 당국의 시장 개입이 기정사실로 되고 있다. 내년 초 발표할 외환보유액은 당국의 시장 개입 정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가늠자가 되는 셈이다.
출처 : 중소기업신문(http://www.sm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