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시장 전망
지금 들어가도 늦지 않을까. ‘인공지능(AI) 반도체 신흥강자’로 떠오른 브로드컴 열풍이 뜨겁다. ‘AI 반도체 슈퍼스타’ 엔비디아가 주춤하는 사이, 맞춤형 반도체(ASIC) 기업인 브로드컴은 한달 새 40%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하며 새 주도주로 떠올랐다. 빅테크 기업 사이에서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타고, 구글·메타 등과 손잡으며 시장의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2018년 백악관을 방문한 혹 탄 브로드컴 CEO를 트럼프 대통령이 추켜세우던 모습. [연합뉴스]
월가는 2025년 주도주를 뜻하는 신조어로 ‘배트맨(BATMMAAN)’을 내놨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끌 히어로 ‘8대장’을 뜻한다. 영어 첫 글자를 따 순서대로 브로드컴·애플·테슬라·마이크로소프트(MS)·메타·아마존·알파벳(구글)·엔비디아가 포함됐다. 완전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 미국 주식시장을 화려하게 지배해온 ‘매그니피센트 7(엔비디아·애플·마이크로소프트·메타·아마존·알파벳·테슬라)’의 확장 버전이다. 이 가운데 최근 주가 폭등한 브로드컴이 배트맨의 첫 번째로 위풍당당하게 합류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서학개미 순매수 종목 톱3 안에 들어
브로드컴은 맞춤형 반도체(ASIC)를 공급하는 기업이다. 월가는 브로드컴을 맞춤 양복점, 엔비디아를 기성복점으로 비유한다. 이제 빅테크로 대표되는 기업은 주문이 몰려있는 기성복보다 각자의 체형을 고려한 맞춤복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간 엔비디아는 범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통해 전세계에 표준화된 하드웨어를 팔았는데, 브로드컴은 고객의 요구에 따라 맞춤 상품을 제공한다. 게다가 맞춤형 반도체는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맞춤형 장인’인 브로드컴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주가도 화답했다. 브로드컴의 주가는 이달 들어 47.35%나 폭등했다. 지난 2일(현지시간) 166.51달러였던 브로드컴의 주가는 26일 245.3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반면, 같은 기간 엔비디아의 주가는 뒷걸음질 쳤다. 월가는 내년 AI 반도체 시장의 성장을 견인할 새 히어로의 등장에 환호하고 있다. 번스타인은 “브로드컴이 엔비디아 모멘텀을 맞이했다”며 “AI인프라 수요의 최대 수혜 기업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브로드컴은 지난 13일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했다. 브로드컴의 ‘1조 클럽’ 가입은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는 엔비디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이뤄낸 대기록이다.
브로드컴의 질주는 4분기(회계연도, 8~10월) 실적 발표가 기폭제가 됐다.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51% 급증한 가운데, 특히 AI부문 매출은 220%나 늘어났다. 실적 증가세도 놀랍지만, 브로드컴이 세계 최대 데이터센터 투자 기업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폭발적 반응을 끌어냈다.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대규모 클라우드 업체가 자체 맞춤형 AI 가속기를 개발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며 “현재 매우 큰 고객 3곳과 AI 칩을 개발 중”이라고 전했다. 구글, 메타 그리고 ‘틱톡’을 운영하는 중국의 바이트댄스가 그 파트너다. 맞춤형 반도체 분야에서 검증된 기술력을 보유한 브로드컴과 빅테크의 협업이 ‘엔비디아 천하’의 AI반도체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배경이다.
발빠른 서학개미도 이미 브로드컴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23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브로드컴(1억4923만 달러)은 최근 1개월 서학개미의 순매수 상위 종목 중 3위(상장지수펀드 제외)를 차지했다. 트럼프 재집권 수혜주로 꼽히는 테슬라(7억2096만 달러), 팔란티어(4억7680만 달러) 다음이다. 최근 상승세는 더 가파르다. 최근 1주 순매수 종목으로는 브로드컴이 2위로, 선두 테슬라를 바짝 쫓고 있다. 테슬라는 CEO인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를 이끈 덕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고 있으나, 배트맨 종목 중 실적 대비 주가가 가장 비싼 종목으로 꼽힌다. 이에 반해 브로드컴은 성장주이면서도 고배당주의 ‘양면적’ 매력이 두드러진다. 2020년 이후 2024년까지 브로드컴의 최근 5년간 연평균 현금배당률은 14.14%에 달한다. 김형태 신한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브로드컴은 2025년 데이터 및 네트워크 인프라 증설에 따른 기대감이 크고, 변동성 확대 구간에서 가치주로의 매력도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HBM 생태계 확대, 삼성 등도 수혜 전망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맞춤형 반도체 열풍은 비단 브로드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브로드컴이 반도체 유리기판을 도입한다는 소식에 SKC, 필옵틱스, 제이앤티씨 등 국내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주가도 들썩이고 있다. 최근 국내 증시의 부진에도 SKC는 24일 기준 최근 1개월간 7.65% 상승했고, 필옵틱스는 12.03% 급등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반도체 양대 산맥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맞춤형 반도체에도 HBM이 사용되기 때문에 HBM 생태계가 확대된다는 측면에서 삼성과 SK하이닉스에도 수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 AI 기대주의 등장에 ‘제2의 엔비디아’ 찾기도 활발해지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025년 최선호주로 브로드컴을 비롯해 마벨 테크놀로지, 온세미, 램리서치,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 등 6개 종목을 제시했다. 그러나 브로드컴이 과연 ‘엔비디아 대항마’로 자리매김할 것이냐에는 이견이 적잖다. 엔비디아의 AI칩은 모든 클라우드 서비스회사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맞춤형 반도체 칩은 한번 선택한 곳에서 다른 칩 인프라로 옮기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모건스탠리는 “맞춤형 AI칩의 비중이 2030년까지 15%로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성장 속도도 관건이다.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최근 2년 엔비디아의 주가가 지속해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실적 상승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며 “브로드컴의 실적이 시장이 기대하는 만큼 따라올 것인지 분기별 체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브로드컴의 최근 주가는 이미 깜짝 실적을 상당부분 반영했고, 애플 등이 자체 맞춤형 AI칩 개발에 나서면서 어떤 새로운 변수가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마냥 장밋빛으로 접근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월가가 제시한 브로드컴의 목표가는 250(번스타인)~260달러(트루이스트) 수준이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