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정부의 차입 한도를 정하는 '부채 브레이크'에서 군비를 예외로 인정하는 재정 규칙 완화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늘리고 독일 경제를 되살려 재무장하기 위한 게임 체인저로,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이 기폭제가 됐다.
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메르츠 차기 총리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연정 파트너와 합의해 독일의 군대와 인프라에 수천억 달러의 추가 자금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연방 선거에서 승리하고 일주일 남짓 만의 빠른 행보다.
이를 위해 메르츠 차기 총리의 기독교 민주연합(CDU)과 바이에른 기독사회연합(CSU), 경쟁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이 함께 다음주 차입 규정 완화 법안을 의회에 공동 제출하기로 했다. 국방비를 부채 제한 대상에서 면제하고 무제한 부채를 허용하는 게 골자다. 독일은 2009년 헌법에 부채 브레이크를 제정해 정부 차입을 제한하고 구조적 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0.35%로 유지해왔다.
메르츠 차기 총리는 이를 통해 자국 군대를 강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도 제공하겠단 그림이다. 5000억유로의 인프라 투자 기금을 설립하기 위해 헌법 개정도 추진한다. 각 주에 대한 부채 규칙도 완화할 계획이다.
엄격하기로 악명 높은 독일의 재정 규칙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우크라이나 휴전을 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벼랑 끝 압박이 주효했다. 메르츠 차기 총리는 "독일이 유럽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2년 유럽 중앙은행 총재였던 마리오 드라기가 유로존 수호를 다짐한 순간을 연상시킨다.
메르츠 차기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이 패키지는 수십 년간 철도, 도로, 교량 및 통신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부족해 2년간의 침체에 시달려 온 독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위에 대한 추가 지출은 우리 경제가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안정적인 성장으로 복귀해야만 감당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인프라에 대한 신속하고 지속 가능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법안이 통과되려면 의회에서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SPD와의 연정 확대는 물론 녹색당의 지지도 필요하다. 국방 전문가들과 경제학자들은 메르츠 차기 총리의 방향 전환을 환영했다.
유럽 외교관계위원회의 수석 정책 펠로우인 야나 푸글리에린은 "독일의 행동 능력에 대한 막대한 투자이며, 독일이 건설적인 유럽 리더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투자"라고 말했다. 워싱턴 소재 외교관계위원회의 유럽 연구원 리아나 픽스도 이번 조치가 "진정한 시대의 전환(Zeitenwende)"이라고 평가했다.
메르츠 차기 총리는 2월 23일 연방 선거 전에는 부채 브레이크 개혁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선거 승리 몇 시간 후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의 운명에 "대체로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며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긴박함이 더 고조됐다. 튀빙겐대학의 헤닝 마이어 교수는 "국방비를 부채 규칙에서 면제하는 것은 며칠 전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접근 방식"이라며 "최근 몇 주 동안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이 없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머니투데이 김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