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검토 없이 '상법 개정' 화두 던졌다
반대로 선회... 당국 수장 발언에 업계 혼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증권회사 CEO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는 무조건 도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지난해 6월)
"상법 개정보다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주주보호 원칙을 두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지난해 11월)
"상법과 자본시장법 개정 의견들이 모두 장단점을 갖고 있고 어느 일방이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올해 2월 12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지금 나온 의무 규정 하나만으로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건 지지할 수 없다"(올해 3월 5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며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밝혔다. 기업 경영 활동의 형사화 등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후다닥 통과됐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금융권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 원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가장 적극적으로 상법 개정 필요성을 역설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입법 과정에서 다양한 정책적인 조율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금융당국 수장의 '입'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 원장은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증권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 직후 브리핑에서 야당이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에 대해 "(법 시행으로 발생 가능한) 화두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서 설계돼야 하는데 법사위에서 상법이 후다닥 통과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자본시장법 선진화 방안을 지지해 왔지만 지금 같은 방식의 통과는 찬성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는 지난달 26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국회 법사위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다.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여당과 재계에서는 의무 조항 대신 강제성이 낮은 '노력' 조항을 넣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대안으로 내놨는데, 이 원장 역시 △'주주' 개념 등 규정 해석의 모호성 △과도한 형사화로 인한 기업 경영권의 과도한 침해 등을 이유로 상법 개정 반대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문제는 이 원장이 상법 개정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해왔다는 점이다. 이 원장은 지난해 6월 예정에 없던 상법 개정 관련 브리핑을 열고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사의 소액주주 보호 의무를 상법 등에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원장은 재계의 반대가 크다는 점을 고려해 상법 개정과 '배임죄 폐지'를 패키지로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놨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법 개정과 배임죄는 1 대 1 교환하는 식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안이 오히려 복잡해졌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대통령실과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이나 논의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몇 달 뒤엔 기류가 또 바뀌었다. 정부와 여당이 상법이 아닌 자본시장법 개정을 밀기로 하면서다. 애초 이 원장이 상법 개정을 화두로 꺼낸 것은 상법과 자본시장법 등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두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법 개정을 하자는 취지였지만, "주주충실의무는 무조건 도입돼야 한다"는 최초 발언이 문제였다. 사실상 상법 개정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말을 바꾼 셈이 돼버렸다. 그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야당이 상법 개정 드라이브를 걸자 "지지할 수 없다"며 180도 입장을 바꾼 모양새가 됐다.
이 원장의 오락가락하는 태도가 문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최근엔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친인척 부당대출과 관련해 임종룡 현 회장의 책임론을 강경하게 제기해 오다 돌연 "임 회장이 임기를 채우시는 게 좋겠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 원장이 원칙론을 밀어붙이면서도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사안도 있는데, 이때 이전에 했던 발언을 뒤집을 수밖에 없어 계속 발목을 잡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 원장은 홈플러스의 기업회생절차 개시와 관련해선 금융회사 위험 노출(익스포저)은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유통업 특성상 다양한 부동산 자산들이 있어 금융권이 대규모 손실을 예상할 상황은 아니다"라며 "일부 거래 업체의 대금 정산 이슈가 생길 수 있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홈플러스 경영권을 가져 책임론이 불거진 MBK파트너스 관련해선 "과거에는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기업과 채권자, 사모펀드 모두가 어느 정도 합의를 통해 이해충돌이 크지 않았지만 최근엔 다르다"며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 관련 여러 장점과 부작용이 있어 상반기 중 연구원 용역 결과가 나오면 이를 기초로 금융위원회와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