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에 쫓기자…구형 K메모리 '출구 전략'
삼성전자·SK하이닉스, 일부 D램 감산
PC 수요 부진에 中 저가공세 겹쳐 공급 과잉
HBM 등 고부가 반도체 투자 위한 '배수의 진'
SK하이닉스가 레거시(구형) D램의 비중을 연말까지 20%로 낮추기로 했다. 지난 6월 말(약 40%) 대비 절반으로 떨어뜨리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3분기 실적설명회에서 ‘일부 D램 생산량 조절’을 언급하는 등 K반도체가 ‘전략 대전환’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의 추격에 한때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평가받던 사업을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인공지능(AI) 시대를 선도할 첨단 반도체 투자를 위해 ‘배수의 진’을 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1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말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와의 미팅에서 더블데이터레이트4(DDR4)와 저전력(LP) DDR4의 생산 비중을 올 2분기 40%에서 3분기 30%로 낮춘 데 이어 4분기에는 20%까지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골드만삭스는 최신 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가 범용 D램의 노출도를 눈에 띄게 낮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DDR4는 2012년 상용화한 구형 규격의 D램으로 저사양 스마트폰, PC 등에 활용한다.
강도가 다르긴 하지만 삼성전자도 범용 반도체 부문 축소를 기정사실화했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장(부사장)은 지난달 31일 콘퍼런스콜에서 “일부 범용 제품은 시장 수요에 맞춰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생산량을 하향 조정할 것”이라며 감산 전략을 공개했다.
한국 기업이 이처럼 ‘출구 전략’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중국 메모리 기업의 물량 공세가 거세진 영향이 크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4분기 중국의 D램 시장 점유율 전망치는 11.8%로 1분기 점유율(10.1%) 대비 1.7%포인트 올랐다.
중국 기업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면서 범용 제품 가격은 매달 급락하고 있다. 범용 낸드(128기가비트 MLC) 고정거래가격은 전월 대비 9월 11.4%, 10월 29.2% 폭락했다. 범용 D램(DDR4 8기가비트) 가격 역시 9월에 17.1% 떨어졌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이 만들지 못하는 AI 메모리 시장에서 격차를 벌리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하이닉스, 구형 D램 생산 비중 20%까지 축소…'AI 반도체'로 승부수
中 내년 점유율 16%까지 올라…저가 공세에 韓 메모리 수익성 악화
“중국 공급사들이 범용 시장 진출을 가속해 수급에 부정적 영향이 커졌다.”(10월 24일 SK하이닉스 실적설명회)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인공지능(AI) 메모리 시장에서의 성과에 가려졌지만 한국 반도체산업은 ‘거대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레드 테크’로 불리는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공세 때문이다. 창신메모리(CXMT) 등 중국 기업은 진입이 쉬운 DDR4(더블데이터레이트4) 등 범용 제품 시장에서 저가·물량 공세를 벌이고 있다.
시장을 ‘레드오션’으로 만들어 경쟁자를 지치게 하고, 그사이에 첨단 제품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전형적인 중국식 전법이다. 한때 ‘돈줄’ 역할을 한 범용 제품 시장에서 중국에 밀리며 중장기적으론 AI 메모리 패권에도 경고등이 켜질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국내 낸드 가동률 70%로
SK하이닉스의 범용 반도체 감산 전략은 DDR4뿐만이 아니다. 중국 우시에 있는 D램 공장에선 2019년 개발된 10나노 3세대(1z) D램 대신 신형 제품으로 분류되는 10나노 4세대(1a) D램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범용 낸드플래시와 관련해선 70~80% 수준으로 떨어진 국내 공장 가동률을 상당 기간 올리지 않고 공급량 조절을 이어가기로 했다. 수요가 확인되는 시점까지 낸드플래시 공급량을 조절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 역시 출구 전략에 적극적이다. 최근 실적설명회에서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구(舊) 공정 기반의 DDR4, 저전력(LP)DDR4 비중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메모리 기업이 범용 제품 시장에서 발을 빼는 건 1차적으로 수요 둔화 영향이 크다. 스마트폰과 PC 시장이 침체하면서 범용 메모리 주문이 줄고 재고가 쌓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CXMT, 양쯔메모리(YMTC) 등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저가 물량 공세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2016년 출범한 D램 업체인 CXMT는 미국의 중국 제재가 시작된 2020년 이후 내수를 기반으로 생산 능력을 확장하고 있다. 2020년 월 4만 장(웨이퍼 기준) 수준이던 D램 생산 능력은 지난 9월 기준 월 16만 장(글로벌 점유율 10%)으로 늘어 세계 4위가 됐다.
중국 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샤오미, 트랜션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CXMT의 12Gb(기가비트) 저전력 모바일 D램인 LPDDR5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YMTC는 최신 제품인 232단 낸드플래시를 양산해 데이터 저장장치인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개발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최근 내년 4분기 중국 기업의 글로벌 메모리 시장 점유율이 16.1%로 올 4분기(11.8%) 대비 4.3%포인트 올라갈 것이란 보고서를 냈다.
○HBM4, eSSD 승부수
한국 기업들은 레드오션이 된 범용 D램·낸드플래시의 생산 비중을 낮추는 동시에 생산 시설을 최신형 AI 메모리로 전환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이 접근하지 못하는 최신 시장을 선점하고, 격차를 벌려야 생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HBM 시장 세계 1위(52.5%)인 SK하이닉스는 내년 공급량을 올해의 두 배 수준으로 늘리기로 했다. 내년 글로벌 HBM 시장이 400억달러(약 55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돼서다. 내년 시장이 열리는 6세대 HBM(HBM4)에선 입출력단자(I/O)를 두 배로 늘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일반형 HBM4에 주력하기로 했다. AI 서버의 필수품으로 꼽히는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와 관련해선 생산 기지인 중국 다롄 낸드플래시 공장의 가동률을 100%로 유지한다.
삼성전자도 HBM과 eSSD, LPDDR5 등 고부가가치 제품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HBM4와 관련해 설계와 생산의 강점을 살려 고객사 맞춤형 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내년 반도체 투자액(약 48조원)의 대부분도 AI 메모리 시설 투자와 연구개발에 투입할 계획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