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AI ‘딥시크’ 충격
③ 건재한 엔비디아 AI 칩 인프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딥시크, AI 모델 개발 과정서
엔비디아 GPU 대량 구매 추정
딥시크가 문턱 낮춘 AI 산업
“결국 반도체 수요 늘 것” 낙관
중저사양 가성비 메모리 관심
한국 HBM 수요도 계속 전망
“이공계 분야 인재 양성 필요”
미국 실리콘밸리를 넘어 전 세계를 흔든 ‘딥시크 충격’을 국내에선 인공지능(AI) 반도체 주가의 폭락으로 실감했다. 서학개미들이 사들인 엔비디아·브로드컴 등 미국 대표 반도체주가 휘청였고, 한국에선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락했다. 하지만 딥시크의 출현이 만들어낼 AI 생태계 확장과 맞물려 반도체 산업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불러온 충격은 최신 엔비디아 AI 칩을 쓰지 않고도 오픈AI와 성능은 비슷하면서 들인 비용은 빅테크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게 맞다면 미국의 대중 제재는 효과가 없었고, 빅테크가 쌓아올린 AI 진입 장벽은 무너진 것이며,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사재기는 돈낭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는 한국 반도체 회사 역시 전망이 어두워지는 셈이다.
하지만 전제부터 의심받는 상황이다. 딥시크가 중국 수출용으로 성능을 낮춘 엔비디아의 H800과 H20뿐만 아니라 H100까지 GPU 5만개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다양한 AI 산업 관계자로부터 제기된 것이다.
미국 반도체 컨설팅 업체 세미애널리시스는 딥시크의 AI 모델 개발에 필요한 하드웨어 지출이 5억달러를 훨씬 웃돌 것으로 추정했다. AI 개발을 위해 여전히 GPU의 중요성이 크다는 얘기다.
정밀도가 높은 ‘FP(Floating Point)16’을 활용한 오픈AI와 달리 딥시크는 FP8로 학습을 진행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FP는 컴퓨터 연산을 위한 숫자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FP가 낮아지면(경량화) 데이터를 단순화하면서 연산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정밀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딥시크는 성능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연산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을 찾아낸 셈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효율성을 위해 정확도를 떨어뜨린 FP8과 FP4의 학습도 엔비디아의 최신 GPU라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
삼성증권은 ‘DeepSeek 사건의 오해와 본질’ 리포트를 통해 “딥시크 V3 모델 훈련에 블랙웰을 사용했다면 더 낮은 비용으로 구현 가능했을 것이고, R1을 블랙웰로 추론했다면 시간을 더 아낄 수 있다”고 봤다. 이어 “딥시크가 제시한 방향성은 사실 엔비디아의 기술 로드맵과 일치하기 때문에 딥시크가 열게 될 추론 영역으로의 시장 확장은 엔비디아가 주장하는 AI 에이전트 사이클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딥시크가 내세운 추론 영역 역시 많은 컴퓨팅 자원을 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향후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쪽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딥시크가 AI 모델 개발에서 충격을 안겼지만, 현재 빅테크가 수십조원을 퍼부어 엔비디아 최신 AI 칩으로 구축한 AI 인프라는 향후 AI 서비스 확대 시기에 후발주자들이 넘을 수 없는 ‘해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딥시크가 해낸 AI 모델의 경량화 및 효율화의 의미는 작지 않다. 최근 회자되는 얘기가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가 언급한 ‘제본스 역설’이다. 19세기 증기기관의 효율성이 개선되면서 석탄을 덜 쓰게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증기기관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면서 석탄을 더 쓰게 되었다는 역설이다. AI 모델의 효율성 증가가 AI 도입의 문턱을 낮추고, AI 서비스와 반도체 수요의 확대를 불러올 것이라는 얘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최고 성능 프로세서에 맞는 최고 사양 메모리를 요구하고, 그 칩셋을 기반으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이뤄지면서 AI 붐이 이어져온 것인데, 이 시장은 당장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중장기 관점에선 AI 시장 내 다양한 분야가 생기면 그에 맞춰 중저사양의 다른 메모리도 주목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딥시크를 계기로 ‘가성비’ 메모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구형 HBM이나 GDDR(그래픽메모리), LPDDR(저전력메모리), LPCAMM(저전력 압축 메모리 모듈) 등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각에선 대중 제재가 딥시크의 AI 모델 개발을 촉진했듯,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의 자립을 높이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화웨이는 자사 어센드 910C가 딥시크 R1의 추론 단계에 쓰이고 있다고 밝혔는데, 910C는 엔비디아의 주력 H100을 겨냥한 제품이다.
현재 업계에선 창신메모리(CXMT) 등 중국 회사의 HBM이 한국보다 2세대 이상 뒤처진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정도 AI 성능을 내려면 3세대(HBM2E)나 4세대(HBM3)는 들어가야 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딥시크가 자극한 AI 수요 확대가 로봇, 자율주행차 등 여러 AI 관련 산업 분야로 HBM 공급을 늘릴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며 “딥시크도 결국 중국이 아닌 엔비디아 제품을 사용한 것에서 보듯 한국 HBM의 수요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 딥시크 충격이라는 ‘현상’ 자체가 미·중 패권 다툼의 산물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가 대항전’이 되어버린 AI 산업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딥시크에 놀라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한국 정부만이 아니다. 인도 정부는 지난달 31일 연내 자체 AI 모델 개발 계획을 밝히면서 GPU 1만8693개가 들어가는 AI 컴퓨팅 시설을 조만간 가동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 덴마크 정부는 엔비디아와 협력해 H100 1528개로 구동되는 슈퍼컴퓨터를 공개했는데, 이를 자국에 필요한 신약 개발 분야 등에 활용하겠다고 밝혀 ‘소버린 AI’의 모델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AI, 반도체는 여러 산업 분야에 파급 효과가 크다”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모두 갖춰져야 관련 산업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의 정책과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중국이 AI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막대한 투자를 해 국내파가 주축이 된 딥시크라는 결실을 맺었듯이, 한국에서도 의대 쏠림을 완화하고 AI, 반도체 등 이공계 연구 분야로 향할 수 있도록 인재 양성 정책을 우선순위로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