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체계 바꾸고, 국민연금 개편 병행
더 늦기 전에 기업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지지만 무작정 정년을 늘리기에는 과제가 적잖다. 정년을 늘릴수록 기업 인건비 부담이 커지는 데다 결국 청년층 밥그릇을 뺏는다는 지적도 마냥 간과하기 어렵다. 정년을 올리는 동시에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 보장 체계도 함께 손봐야 한다는 의견도 설득력 있다. 정년 연장의 조건을 들여다본다.
정년 연장 방식을 두고 기업과 정부부처, 지자체 간 이견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공무원 정년 연장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 (연합뉴스)
1. 기업 인건비 급증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 손봐야
재계에서는 정년을 연장하면 당장 기업 인건비 부담이 불어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국내 기업들은 대부분 근속 연수에 따른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라 법정 정년을 연장하면 기업 임금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우리나라 기업의 호봉별 운영 현황(2023년 기준)을 보면 300인 이상 기업은 58.4%, 1000인 이상 기업은 65.1%로 기업 규모가 클수록 호봉제 도입 비율이 높다. 호봉제는 근속 기간이 길어질수록 생산성과 무관하게 임금이 올라가는 제도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정년을 65세로 연장하면 60~64세 추가 고용에 15조8626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한다.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직접비용) 14조3875억원과 4대 보험료(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간접비용 1조4752억원을 합친 수치다. 한국경제인협회의 ‘고령자 고용정책에 관한 기업인식 조사’ 보고서를 봐도 기업 10곳 중 7곳(67.8%)은 정년 연장에 대해 부담을 느낀다. 정년 연장이 경영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응답한 기업 비중(32.2%)의 2배 수준이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연공(근무 기간) 상승으로 인한 임금 인상 효과가 가장 큰 나라는 한국인 것으로 나타났다. OECD 조사에 따르면, 10년 차 정규직 근로자의 향후 10년간 예상 임금 상승률은 한국이 15.1%로 관련 수치가 집계된 27개국 중 가장 높다.
정년 연장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기업은 가뜩이나 불황 속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투자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한 축인 투자 감소를 불러와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를 직무, 성과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2. 청년 일자리 급감
청년층 의무고용비율 제시 필요성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임금 조정을 동반하지 않은 정년 연장은 기업 인건비 부담을 높일 뿐 아니라 청년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작용까지 불러올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정년 연장이 고령층과 청년층 고용에 미치는 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정년 연장 대상이 1명 증가할 때 기업에서 평균 0.2명의 청년 고용이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업체 규모가 크고 고용 보호가 상대적으로 강한 기업에서 청년 고용에 더 부정적 효과를 미친다는 분석이다.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2016년 당시 정년 60세 의무화가 시행된 후 2017~2019년 전일제 일자리 기준으로 56~60세 장년층 고용이 1명 증가할 경우, 23~27세 청년 일자리가 적게는 0.29개에서 많게는 1.14개까지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때문에 청년층이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정년 연장이 취업 문턱을 더 높일 것으로 우려한다. 청년들이 선호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게 정년 연장 혜택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년 연장과 동시에 청년층 의무고용비율을 기업에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대일 교수는 “정년 연장 논의에서 임금 조정이 빠지면 청년층 일자리를 노인한테 주는 것이다. 고령화로 정년 연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회사가 줄 수 있는 임금은 한정적이라 유연하게 임금을 조정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층뿐 아니다. 기업이 고령자 고용에 따른 비용 증가를 상쇄하기 위해 ‘한국 경제 허리’ 역할을 하는 3050세대 임금을 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연세대 경제학부 연구진(이종관·심명규·양희승)의 ‘젊은 층, 중장년층, 노년층: 도시의 고령화 파급 효과’ 논문에 따르면 2013~2019년 기준 55~65세 고령 근로자의 비중이 1%포인트 증가했을 때 전체 근로자 임금은 0.63% 감소했다. 특히 가장 많은 임금 근로자가 집중된 중장년층 임금은 0.9% 줄어 감소폭이 컸다. 양희승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비용이 높은 고령층 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신입을 덜 뽑기보다는 중년층 조기 퇴직을 장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3. ‘퇴직 후 재고용’이 대안?
근로 시간 단축형 임금피크제 눈길
재계에서는 일괄적인 정년 연장 대신 ‘퇴직 후 재고용’ 방안이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퇴직 후 재고용을 하면 근속 연수가 아닌 직무, 성과 중심으로 근로 계약을 새로 할 수 있어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정년을 넘긴 노동자를 계약직 등으로 다시 고용하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업장은 지난해 말 기준 36%에 달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2019년(28.9%)보다 7.1%포인트 상승했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이 자구책으로 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도 팔을 걷어붙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년 연장은 노사 자율 영역으로 남겨두고 재고용 활성화를 위해 ‘60세 이후 고령자 재고용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업에 정년이 지난 고령자의 재고용 노력 의무를 부여하는 대신, 재고용은 새로운 근로계약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자는 취지다. 고용노동부 역시 정년 연장과 재고용을 포괄하는 ‘계속고용(재고용, 정년 연장, 정년 폐지)’이라는 용어를 내세웠다. 한요셉 KDI 연구위원은 “무작정 정년을 늘릴 경우 대기업 근로자와 정규직에 혜택이 집중될 수 있다. 정년 연장에 앞서 임금 체계를 업무, 생산성에 따라 급여가 다른 ‘직무급제’로 바꾸는 등 유연한 근무 체계 개편 작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론 계속고용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퇴직 후 재고용 같은 계속고용 제도를 활용한다지만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실제로 공무원들은 대부분 퇴직 후 재임용을 희망하지 않는 분위기다.
전국시군구공무원노동조합연맹이 발주한 ‘공무원연금 소득 공백 해소를 위한 퇴직자 재고용 업무 분야 발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공무원 2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3.1%가 퇴직 후 재임용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재계와 노동계가 계속고용 방식을 두고 대립하는 것처럼, 정부와 공무원도 비슷한 양상의 갈등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A대학 교수는 “기업은 계속고용 여부를 선택하도록 하면 되지만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 일괄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며 “고령자 고용을 늘릴 수 있는 사회, 제도적 공감대부터 만들고 자율적인 합의기구를 통해 정년 연장, 계속고용 관련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근로자들이 시간당 임금 수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근로 시간을 줄여, 임금 총액을 감소시키는 방안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이른바 ‘근로 시간 단축형 임금피크제’로 근로 시간을 단축하면서 정년을 연장하면 정부가 임금 감소분의 일정액을 지원하는 식이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일정한 근로소득과 여가를 동시에 즐기면서 차차 퇴직을 준비하는 만큼 퇴직에 따른 충격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줄어든 근로 시간 동안 여가뿐 아니라 교육 훈련을 통해 스스로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4. 국민연금 개편도 변수
의무 가입, 수급 개시 연령 올려야
정년 연장이 현실로 다가올 경우 과제는 또 있다. 정년을 올리면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 보장 체계도 바꿔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연금 의무 가입 연령이다. 지금은 국민연금 가입 상한 연령이 만 59세인데 정년을 5년 늘리면 그에 맞춰 64세로 늦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다만 재계 부담이 변수다. 지금은 60~64세 근로자가 연금보험료 9%를 모두 부담하는데, 의무 가입 연령이 늦춰지면 회사가 절반인 4.5%를 내야 해 기업 부담이 커진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 조정도 필요하다. 노동계가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것은 60세에 퇴직하면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수년간 ‘소득 공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2013년 61세를 시작으로 5년마다 1세씩 높아진다. 올해는 63세부터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고 2033년에는 65세로 늦춰져 소득 공백기는 더 길어진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과 법정 정년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에 따라 법정 정년을 연장하는 고령자고용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년이 올라가면 국민연금 의무 가입 연령과 수급 개시 연령도 올려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목소리다.
고용보험 개선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슈다. 현재 65세 이후 신규 취업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고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정년을 연장하거나 계속고용 제도가 안착하면 실업급여 연령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년 연장에 앞서 연금, 고용보험 등 각종 사회 보장 제도부터 손봐야 한다는 의미다.
5. 결국 대기업 정규직만 혜택?
中企 고령 인재 몰릴 환경 조성 필요
한편에서는 정년을 연장한다고 해서 대부분 근로자가 혜택을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비등하다. 정년 연장이 자칫 소수 정규직만을 위한 ‘반쪽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법정 정년까지 정규직 임금 근로 일자리를 유지하는 비중은 전체 고령자의 14.5%에 그친다. 정년과 실제 퇴직 연령 사이의 괴리도 꽤 크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취업 경험이 있는 55~64세 인구는 주된 일터에서 평균 15년 근속해 49.4세에 직장을 그만둔 것으로 나타났다. 법정 정년인 60세에 훨씬 못 미치는 만큼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정작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
유예 기간을 두고 단계적 정년 연장을 진행할 경우 기업들이 어떻게든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 유예 기간 동안 조기 퇴직시키는 사례도 늘어날 수 있다. 이때 예상치 못하게 직장을 떠나는 피해 계층이 나타날 우려도 큰 만큼 이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리해보면 정년 연장, 계속고용 제도 도입에 앞서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한 한국식 고령자 일자리 모델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이 적잖다. 소수의 좋은 일자리를 두고 고령층과 청년층이 ‘제로섬’ 게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기업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사업 환경이 열악한 중소기업에도 고령 인재가 몰릴 만한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정년 연장을 통한 고령층 고용 증가 효과는 주로 대기업에 집중돼 중소기업들은 조기 퇴직, 권고사직이 빈번해질 것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도 정년 연장 혜택을 누리기 어려워 정년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고령층 지원책이 병행돼야 한다. 고령층은 시간 선택이 유연한 일자리를 선호하는 만큼 기업마다 특화된 고용 서비스,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 한요셉 연구위원의 설득력 있는 의견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4호 (2024.11.13~2024.11.19일자) 기사입니다]
김경민 매경이코노미 기자(kmkim@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