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경제] 급변하는 수출 생태계 전략 필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피터 나바로만큼 ‘바이 아메리칸, 하이어 아메리칸’(Buy American, Hire American·미국산 구매, 미국인 고용)이라는 두 가지 신성한 규칙을 끈기 있고 효과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대(對)중국 무역 전쟁을 최초로 기획한 피터 나바로 전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의 귀환을 알리며 지난달 4일 (현지시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이다. 나바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무역·제조업 선임 고문을 맡으며 무역·관세 정책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는 20일 취임하는 트럼프 당선인은 2기 인사를 통해 더 강력한 자국우선주의 기조를 대내외 천명하고 있다.
유럽연합(EU)에서도 ‘바이 유러피안’(Buy European) 물결이 어느 때보다 거세게 일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에 두 달 앞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정책 구상은 ‘경제 안보’에 방점이 찍혀 있다. 환경과 인권 가치에 기반한 1기 때의 온건 분위기에서 180도 달라졌다. 두 사람은 변수가 없는 한 각각 2029년 1월(트럼프)과 12월(라이엔)까지가 임기다. 앞으로의 4년여 동안 한국을 포함한 수출 주도형 국가들의 가시밭길이 예견돼 있다는 분석이다.
자국 산업 보호를 최우선에 두는 미국과 EU 행정부의 강경 기조는 국내 수출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다. 16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미국 수출액은 1277억90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의 23.2%를 차지했다. 대EU 수출액도 680억8000만 달러로 12.3%에 달했다. 전체 수출액의 3분의 1 이상이 이 두 지역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
두 지역이 자국 중심의 내수 경제를 우선시하면 수출은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배터리·철강·조선 등 주요 기업들은 시나리오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가장 걱정에 쌓인 것은 배터리 업계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예상보다 더 길어지면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배터리 업계는 현지화 전략을 고민하고 있지만 실적 악화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현지화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며 “미국과 EU 모두 역내 생산과 공급망 구축을 요구하고 있어 현지에 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배터리 기업의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철강 업계 역시 미국과 EU 양쪽에서 보호무역주의와 탄소배출 규제의 이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당선인은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를 통해 모든 국가에서 수입하는 철강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는 철강 수입규제 조치를 단행했었다. 당시 한국은 오랜 외교 협상 끝에 관세 부과는 피했으나 여전히 대미 수출량을 제한받는 ‘쿼터 부과국’으로 분류돼있다. 이로 인해 2015~2017년 연평균 385만t이던 한국산 철강의 미국 수출량은 2018년부터 200만t대로 급감했다.
EU에서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난관이다. CBAM은 수입된 제품의 탄소 배출량에 따라 관세 등을 부과하는 제도로 2026년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국내 철강업계는 CBAM 대응을 위한 태스크포스(TF) 팀을 만들고 저탄소 철강 기술 개발에 나서는 등 유럽 시장에서 생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재윤 산업연구원 탄소중립산업전환연구실장은 “철강업계의 경우 트럼프 1기 때 학습효과가 있듯이 미국에서는 현지 진출을 적극 검토해야 하며 EU 시장은 CBAM에 대한 철저한 대응이 필수”라고 말했다.
‘글로벌 사우스’ 시장으로 시선을 넓혀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을 뜻한다. 이 실장은 “글로벌 사우스는 철강 수요가 증가할 주요 시장”이라며 “성장세가 견고할 것으로 전망돼 철강업계 수출 다변화의 중요한 대안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반면 조선업계의 경우 미국과 EU 모두에서 기회 요인이 더 늘 수 있지만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조선사들은 미국 및 유럽에서의 중국 의존도 감소 움직임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선 등 포트폴리오 다변화 우위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중국은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점유율 71%를 차지하는 등 물량을 싹쓸이하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국내 조선업은 고부가가치 선박에 강점이 있지만, 일반 선박 경쟁력과 중소형 조선소 생태계는 약화된 상태”라며 “국내 조선업은 품질과 신뢰를 바탕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만큼,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다양한 선종과 중소형 조선소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전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정부 대신 국내 주요 경제단체들은 미국과 유럽 지도자의 2기 행정부 출범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코트라는 지난 14일부터 ‘수출투자 비상대책반’을 가동하고 수출기업 지원에 나섰다. 코트라 관계자는 “전 세계적인 불확실성 확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주 1회 수출기업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동향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비상대책회의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백재연 기자(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