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애플 투자자라면, 올해 첫 거래일의 충격을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영국계 투자은행 바클레이스가 애플의 투자 등급을 강등하자 애플 주가는 4% 가까이 빠졌습니다.
이는 아이폰15 판매 부진, 규제 압박, 반독점 이슈 등으로 인해 사업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투자은행 DA데이비슨의 길 루리아 애널리스트는 “애플이 틀에 박힌 혁신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성장을 가속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혁신의 길을 잃은 듯했던 애플은 최근 반전의 매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출발점은 지난 6월에 개최된 세계개발자회의(WWDC)였습니다. 애플은 이 자리에서 자사 첫 AI 시스템인 ‘애플 인텔리전스’를 공개하며, 폐쇄적이고 느린 AI 부문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7월에는 자사 AI 시스템의 기초가 되는 학습 모델로 영원한 숙적인 구글의 클라우드 서버를 사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엔비디아의 AI칩이 아닌 구글의 기술력을 활용하여 자사 AI 모델을 고도화하고, 1년 안에 다수의 생성형 AI 기능을 출시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애플이 이처럼 180도 달라진 이유는 AI 시대가 기업에게 요구하는 초격차와 생존 압박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거대한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애플의 혁신 여정에서 노출되는 빅테크(구글, 엔비디아, TSMC)와 시장 역동성(스마트폰, 반도체) 측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 기업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바로 삼성전자입니다. 틀에 박힌 혁신을 벗어나는 것은 애플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에게도 절박한 과제입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최악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삼성전자가 겪고 있는 축소와 퇴행의 위기는 동시다발적이고 집합적이라 더욱 무섭습니다. 스마트폰 사업에서는 애플이 중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삼성을 누르고 세계 1위에 복귀했습니다. IDC 집계 기준, 애플의 글로벌 출하량이 2억 3460만대로 삼성전자(2억 2660만대)를 앞섰습니다. 반도체 사업에서는 가트너 집계 기준, 인텔(487억 달러)의 매출액이 삼성전자(399억 달러)를 압도했습니다.
올해 반도체 사업에서 또 하나의 큰 위기 징후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의 점유율 축소입니다. 대만 TSMC에 시장을 계속 빼앗기면서 올 하반기에는 삼성의 점유율이 한 자릿수까지 밀릴 수 있습니다. 현재 점유율은 TSMC가 61%, 삼성전자 11%로, 점유율 추가 하락이 염려되는 이유는 바로 구글입니다.
삼성 파운드리 사업에서 구글의 이탈은 치명적입니다. 삼성전자에 AI칩 생산을 맡겨온 구글의 ‘헤어질 결심’은 사실 올해 상반기부터 루머성으로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최근 외신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모바일 기기에서 AI는 클라우드 AI와 온디바이스 AI로 나뉩니다. 온디바이스 AI는 고사양 칩을 통해 기기에서 AI 연산을 곧바로 처리합니다. AI 스마트폰으로의 진화에 필수적인 이 고사양 칩을 구글은 자체 개발했습니다. 이어 2021년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해당 AI칩 생산을 맡겨 구글 픽셀폰에 탑재해왔습니다. 그런데 구글은 이 칩의 5세대 버전(텐서 G5)부터 삼성이 아닌 TSMC에 맡길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 제품에서 발열 이슈 등이 제기되어 비용 부담이 크더라도 TSMC로 바꿀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삼성의 고객 명단에서 구글이 빠지면 시장 점유율은 물론 평판 측면에서도 큰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애플보다 앞서 모바일 AI 주도권을 잡았던 삼성전자의 위치도 언제 역전될지 모릅니다. 삼성전자가 올해 갤럭시폰을 통해 먼저 선보인 모바일 AI 역량도 올해 하반기 시장에서 엄중한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삼성은 기기 자체적으로 AI가 구동되는 AI폰을 애플보다 먼저 선보였습니다. 갤럭시 S24 시리즈에 자체 AI인 ‘가우스’와 더불어 구글 ‘제미나이’를 심었습니다. 삼성은 올해 2억 대의 갤럭시폰에 온디바이스와 클라우드 AI를 함께 구현해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플은 최근 공개한 ‘애플 인텔리전스’ 청사진을 통해 오픈AI, 구글과 과감한 협업으로 빠른 추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이르면 10월 애플 인텔리전스 서비스를 적용할 예정으로, 두 달 뒤면 갤럭시 AI와 아이폰 AI 서비스 수준에 대한 소비자들의 냉정한 평가가 나올 것입니다.
최근 유럽연합 경쟁당국의 조사 움직임도 걱정스럽습니다. EU 집행위원회는 삼성전자가 갤럭시폰에 구글 제미나이를 선탑재한 행위가 다른 업체들의 챗봇 서비스 혹은 앱 운용을 방해하는지 여부에 대한 업계 설문조사를 마쳤습니다. 이 탐문 조사 결과를 토대로 EU 경쟁당국이 반독점 조사를 개시할 경우 구글과 삼성의 AI 연대에 새로운 사법 리스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거 EU 경쟁담당 수석 부집행위원장은 “삼성 디바이스에 구글의 제미나이 나노를 선탑재한 계약의 영향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파악하는 (경쟁 제한) 위험성은 거대 빅테크들이 소규모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사들이 최종 이용자들과 연결되는 것을 방해하는지 여부”라고 전했습니다. EU 경쟁당국이 본격 조사 단계에 들어가면 구글 제미나이를 등에 업은 삼성의 AI 차별화 전략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애플도 바뀌었습니다. 삼성은 처절한 ‘을’의 자세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폰 제국을 건설한 콧대 높은 애플조차 지금 몸을 낮춰 구글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폐쇄적 생태계로 유명한 애플 이상으로 삼성은 전자회사라는 단일 몸통에서 스마트폰을 만들고 그 폰에 들어가는 칩을 직접 생산하며 칩 설계까지 수행하는 제국의 형태를 유지해왔습니다. 그 결과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TSMC와 같은 ‘을’의 정신이 부족하다는 고객사 불만이 제기되었고 칩 생산에서도 발열 문제 등 품질 이슈가 반복되었습니다.
혁신을 더디게 하는 원인자인 제국형 사업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오류를 과감히 인정하고 뼈를 깎는 을의 자세로 혁신을 시도해야 합니다. 실제로 삼성은 AI 골드러시 시대를 맞아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새 GPU 공급처가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면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호 윈윈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까지 검증받아야 합니다. 1987년 설립되어 세계 반도체 공급의 젖줄이 된 TSMC조차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철저한 을의 자세로 37년을 버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