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삼성, 위기의 한국 경제] <上> 삼성의 현주소
사진=김지훈 기자
삼성을 바라보는 안팎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조 단위의 분기 영업이익을 내는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나는 모습이다. 문제는 삼성의 위기가 단순히 한 기업의 위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성의 위기는 대한민국 경제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반도체 수출 비중이 20%에 달하는 한국 경제의 기둥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일보가 15일 전현직 삼성 임직원 8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종합해보면 삼성 위기론의 실체는 크게 5가지로 압축된다. 최종 의사결정 과정에 기술인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것과 와해된 조직문화, 이에 따른 신기술 전략 부재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이 같은 문제는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후발주자에 그쳤다는 오명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내부에서 비롯된 위기는 외부 환경과도 맞물려 증폭됐다. 대외적으로는 반복되는 총수 일가의 사법 리스크와 주52시간 규제 여파로 일하지 않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현직 임직원들은 비정상적인 기업 거버넌스(관리 체계)를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전 삼성전자 사장 A씨는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이 핵심 의사결정 체계 안에 있어야 하는데 재무나 법무가 힘을 갖고 있다 보니 기술 전문가가 설 자리가 없다”며 “예전에는 각 사업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은 각자도생 분위기가 확연하다. 인텔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연구·개발(R&D) 과정에서 HBM을 차세대 먹거리로 예상하지 못한 것은 반도체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릴 전문가가 의사결정 체계에서 빠진 결과라는 진단이다. 전 삼성전자 부사장급 임원은 “오래전부터 삼성이 망할까 두려웠다. 엔지니어가 ‘이 기술은 빨리 준비해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기술을 모르는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하다 포기하는 사례가 생기는 걸 보고 위기감을 가졌다”며 “지금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공식이 통하지 않는 삼성이다. 공격이 아닌 수성의 리더십만 남았다”고 말했다. 내부적으로 이재용 회장이 삼성 안에 형성돼 있는 견고한 카르텔을 깨는 인적 쇄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충언이 잇따르고 있다.
과거 치열하게 경쟁하고 토론했던 조직문화가 무사안일만을 추구하는 분위기에 점령당했다는 공통의 목소리도 있었다. ‘삼성맨’이라는 자부심(로열티)도 옛말이라는 것이다. 전 삼성전자 사장 B씨는 “하기 싫어 피하고, 두려워서 피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 같다”며 “젊은 세대 탓만 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치열함에 관한 이야기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치열함이 없다”고 말했다.
‘1등 기업’이라는 이미지에 취해 내실을 다지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전 삼성전자 사장 C씨는 “삼성전자가 안주만 하려는 기득권이 돼버렸다.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 이렇게 된 이유는 내실이 아닌 허영과 오만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며 “삼성 반도체는 엄밀히 말해 국제사회에서 기득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삼성이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셈”이라고 했다.
지난 8일 반도체(DS)부문을 이끄는 전영현 부회장이 낸 ‘반성문’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기업의 변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인사)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말만 앞선 입장문으로 어떤 변화를 이끌겠느냐는 것이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정기인사가 있는 11월은 ‘아무도 일하지 않는 달’로 여겨진다. 한 삼성전자 직원은 “새로운 전략과 파괴적 인사로 변화를 보여줘야 하는데, 직원들 사이에 그런 기대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며 자조적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의 조직문화 관리 실패가 악화일로의 노사 관계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지난 7월 창사 이래 처음으로 단행됐던 총파업이 앞으로는 전방위로 번져 매년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다. 또 다른 삼성전자 임원은 “책임과 신뢰라는 삼성의 큰 자산이 지속적으로 훼손돼 왔고, 쉽게 복원되지도 않을 것 같다”며 “직원들이 경영진에 대한 신뢰를 잃은 만큼 이를 복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의사결정 구조에 불만을 품고 조직문화도 와해되면서 신기술 전략은 시대에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총수를 포함한 주요 경영진의 사법 리스크가 장기화하면서 사업별 로드맵조차 만들기 힘들 지경이 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사장 출신 A씨는 “삼성은 R&D로 먹고사는 회사인데 사법 리스크로 6~7년 이상 공격적 경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며 “기업을 옥죄는 분위기가 반복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상무 출신 양향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회장 재판이 늘어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이 됐다. 전쟁터에 나가야 할 병사를 지휘할 리더가 결정을 못 내리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한마디로 오합지졸 형국이다. 첨단산업은 공격적 결단이 필요한데 투자가 계속 미뤄졌다”고 지적했다.
외적으로는 주52시간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성토가 나온다. 양 전 의원은 “당장이라도 바꾸고 싶은 것이 주52시간 규제다. 직군에 따라 근무시간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며 “R&D 인력은 더 일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이에 따라 처우를 다르게 하면 된다. 단순히 업무 강도를 따질 것이 아니라 국가를 지키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장 출신 D씨는 “삼성 R&D 인력은 타이어 10개를 메고 뛰어야 하는 처지인 만큼 유연하게 인력 운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반도체는 기업이 아닌 국가 간 전쟁이 됐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최후의 보루 반도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삼성을 재벌로 보는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희정 기자(simcity@kmib.co.kr)
김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