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도 텅 빈 식당 - 13일 오후 12시 20분, 대전 유성구의 한 칼국수 전문점에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다. 소상공인연합회가 10~12일 소상공인 163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88.4%가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매출이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매출이 50% 이상 줄었다’는 응답도 36%였다. /신현종 기자
계엄과 탄핵 추진으로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서 정부가 추진해 온 각종 민생 대책과 법안 처리가 줄줄이 무산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정부가 올해분 연말정산부터 적용할 예정이었던 재래시장 지출액과 추가 소비 증가분에 대한 소득공제율 확대는 없던 일이 됐고, 자녀 공제 한도를 10배로 늘려주는 28년 만의 상속세 개편도 무산됐다. 내수 부진 장기화와 수출 둔화 등으로 경제에 적신호가 켜지는 가운데, 가계나 자영업자 생계에 바로 영향을 주는 민생 법안마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정부는 지난 8월 말 민생 안정 대책을 내고 40%였던 재래시장 지출액 공제율을 올해분 연말정산부터 80%로 높이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1년 전보다 늘어난 소비에 대한 소득공제율도 두 배로 늘려준다고 했다. 작년분 연말정산까지는 신용카드나 현금 영수증 등 사용액이 전년의 105%를 초과한 지출의 10%(100만원 한도)만큼 소득공제를 늘려줬는데 이 비율을 20%로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여야 간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국세청은 법 통과를 전제로 연말정산 시스템을 정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 통과가 무산되면서 소득공제 확대는 물거품이 됐다.
휴대전화 통신사를 바꾸는 소비자들에게 이동통신사들이 지급하는 보조금을 제한하는 단말기 유통법을 폐지하는 법안, 중개 플랫폼 대금 정산 기한을 구매 확정일 20일 이내로 의무화하는 티메프 사태 방지 법안(대규모유통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소상공인·자영업자에 대해 이자 부담을 낮춰주고 전기 요금, 배달 수수료를 지원하는 대책도 내년 예산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픽=김성규
계엄 사태 이후 국회 문턱을 넘은 민생 법안은 극소수다. 올해분 연말정산부터 최대 100만원의 결혼 특별 세액공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조특법 개정안, 아이를 낳고 회사에서 받은 출산 지원금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담은 소득세법 개정안 정도다. 더불어민주당이 “부자 감세”라며 반대한 상속세 최고 세율 인하(50→40%) 같은 쟁점 법안뿐 아니라 여야 의견 차가 크지 않았던 민생 법안 처리까지 대거 무산되면서 탄핵 정국을 둘러싼 정치권 혼란이 민생에 직접 타격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상공인 지원 예산 증액도 무산
여야는 2001년부터 5000만원이었던 예금자 보호 한도를 24년 만인 내년부터 1억원으로 높이는 내용의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지난달 합의했지만, 올해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린 지난 10일 안건으로 채택되지도 못했다. 인신 매매 피해자 등이 폭리 대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연리 60% 이상 대출 계약은 아예 무효화하는 내용의 대부업법 개정안도 여야 합의가 됐음에도 연내 국회 처리가 무산됐다.
주택 공급 활성화를 위한 법안 처리도 정치권 파행으로 지연되고 있다. 여야는 각종 인허가 절차를 단축해 재건축·재개발 사업의 속도를 최장 3년 정도 단축해 주택 공급을 활성화하는 내용의 재건축·재개발 특례법을 제정하기로 했지만, 여야 간 정치 공방이 이어지면서 세부 내용을 둘러싼 이견을 풀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는 “새해 들어서도 탄핵 정국으로 법안 심사가 상당 기간 중단될 것 같다”고 했다. 이 법 제정안은 조합과 시공사 간 공사비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행정 지원을 강화하고 재건축·재개발 사업의 용적률을 3년 한시로 법적 상한의 최고 1.3배까지 높여 사업성을 높이는 내용도 담고 있다.
민생 법안과 함께 소상공인들의 이자, 배달 수수료 부담을 줄이려는 각종 예산 증액도 불발됐다. 고금리 대출을 받은 소상공인의 이자 비용 지원 예산(3000억원), 전기 요금 특별 지원 예산(2520억원), 배달 수수료 부담 완화 예산(588억원) 등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 선포 하루 전인 지난 2일 소상공인 대책을 발표하면서 영세 소상공인의 배달 수수료 부담을 30% 덜어주겠다고 밝혔다.
◇거부권 행사 불투명한데 양곡법은 통과
이런 가운데 정부가 “쌀 공급 과잉을 부추길 수 있다”며 반대해 온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가 불투명해지면서 야당 주장대로 시행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 법안은 계엄 사태 이전인 지난달 28일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다. 양곡법은 팔리지 않고 남은 쌀의 일정량을 내년 12월부터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게 하고, 쌀 시장 가격이 양곡관리위원회가 정한 ‘기준 가격’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차액을 정부가 농가에 지급하도록 한 내용을 골자로 한다. 정부는 “이 법이 시행될 경우 쌀 재배가 계속 늘어나 2030년에는 쌀 매입과 보관에만 예산이 연 3조원 들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하지만 이 법안은 남은 쌀 매입과 보관에 예산이 얼마 들어갈지 추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년 예산안에도 관련 비용이 반영되지 않은 상태다. 당장 농림축산식품부는 반 토막 난 정부 예비비로 내년에 얼마가 들지 모를 관련 예산을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내년 예비비로 4조8000억원을 편성했지만, 야당이 절반인 2조4000억원으로 깎은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초 정부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법안을 막겠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 표결로 거부권 행사가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탄핵 소추 가결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될 경우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을 한덕수 국무총리가 거부권을 대신 행사하면 되지만, 한 총리에 대한 탄핵 처리 가능성도 있다. 최근 계엄 파문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이 한 총리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한 점이 변수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맡아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탄핵 정국과 계엄 전 국무회의 참석자를 둘러싼 경찰 수사가 본격화할 경우 거부권 행사를 포함한 국정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희래 기자 raykim@chosun.com
이준우 기자 rainracer@chosun.com
강우량 기자 sab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