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총재 “정치적 리스크 큰 영향
올 성장률 1.9% 밑돌 가능성”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16일 기준금리를 연 3%로 동결하기로 했다. 경제성장률 하락을 예고하면서도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널뛰는 환율 때문에 결국 ‘숨 고르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사진)는 계엄 사태로 원-달러 환율이 30원가량 더 올랐다고도 밝혔다.
앞서 시장에서는 정국 불안으로 소비 심리가 얼어붙는 등 경기 침체 신호가 강해진 만큼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았다. 금통위도 의결문에서 “앞으로 수출 증가세가 둔화하고 소비 심리 위축 등으로 내수 회복세가 예상보다 더딜 것”이라며 “지난해와 올해 성장률이 작년 11월 전망치(2.2%·1.9%)를 하회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동결을 선택한 이유는 원-달러 환율 불안 때문이다. 이 총재는 “지난달 비상계엄 사태 이후 폭등한 원-달러 환율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체력)에 비해 크게 뛴 수준”이라며 “계엄을 거치며 1400원에서 1470원으로 뛴 70원의 상승분 중 30원 정도가 계엄 등 정치적 이유로 오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앞으로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미국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속도 조절, 정치 이슈 등 환율 변동성을 키울 수 있는 불확실성이 큰 만큼 금리를 동결하고 대내외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총재는 “오늘(16일) 원-달러 환율이 많이 내려간 것에는 미국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과 어제 일어난 일(윤 대통령 체포)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체포 사태 이후 헌법재판소의 프로세스(탄핵심판 절차)가 정상화될지에 경제적인 안정 여부가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또 “대통령 (체포) 영장 집행이 전 세계에 뉴스로 나가니까 제게 많은 전화가 온다”고 해외의 우려를 전하며 “정치와 경제를 최대한 분리해 정치와 관계없이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전했다.
다만 현 경기 상황에 대한 한은의 우려가 분명한 만큼 곧 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올해 두 번째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는 다음 달 25일 열린다. 이 총재는 “경기 상황만 보면 금리를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금통위원 모두의 의견”이라며 “(이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전원이 3개월 내 금리 인하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한은, ‘환율 안정>경기 부양’ 판단… 트럼프 취임 등 고려 속도조절
[한은 기준금리 동결]
고환율에 물가상승-자금 유출 우려… 2연속 금리인하 후 일단 숨고르기
외신 “정치 혼란 속 예상 못한 동결”
일부 “금리인하 시기 놓칠수도” 비판… 이창용 “1년 뒤 평가하라” 날선 반응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동결한 데는 국내외 정세 불안으로 1500원에 육박하는 환율 불안에 대한 우려가 작용했다. 지난해 10월과 11월 두 차례 연속 금리를 내리며 경기 부양에 힘을 실었지만 새해 첫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선 환율 안정을 택한 것이다. 환율 급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 압박과 증시의 자금 유출, 대외 신인도 하락 등 후폭풍이 치명적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 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 취임과 올해 첫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등 빅 이벤트가 이어지는 것도 한은이 ‘한 박자’ 쉬어 가기를 선택한 배경으로 풀이된다.
●경기 부양보다 환율 안정에 초점
1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이창용 총재가 기준금리를 결정한 뒤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6일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금통위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적 요인 때문에 환율이 한국의 경제 수준을 고려할 때 훨씬 더 높은 수준”이라며 “경기 등 대내 상황보다 신인도 등 대외 균형에 방점을 두고 동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날 이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5명은 금리 동결에 동의했으며, 신성환 위원만 금리 인하 소수 의견을 냈다.
블룸버그통신과 CNBC 등 외신은 이번 한은의 결정에 대해 “정치적 혼란 속에 예상치 못한 금리 동결”이라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내수 침체 극복을 위해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 바 있다.
시장에서는 미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승리하고 12·3 비상계엄과 탄핵 등 국내 정치 불안이 겹치면서 환율이 급등하자, 한은이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금리 동결 카드를 택했다고 풀이한다.
최근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국내외 정치 뉴스에 따라 환율의 변동성이 확대되자 불확실성이 완화될 때까지 ‘시간 벌기’에 나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총재는 이날 “환율 3, 4원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는데, 정치적 뉴스가 터지면 20∼30원이 팍팍 튄다”며 “힘이 빠지고, 그다음에 조정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또 “오늘 환율이 빠진 것도 어제 일(윤 대통령 체포)이 포함된 변화”라며 “환율 등 경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정치”라고 지적했다.
환율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재점화 우려도 금리 동결의 배경으로 꼽힌다. 이 총재는 “환율이 1470원으로 유지되면 올해 물가 상승률이 2.05%까지 높아진다”며 “최근 국제 유가 상승까지 고려하면 충격은 더 클 것”이라고 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다음 달에는 한은이 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관측한다. 이 총재는 “이미 기준금리 인하 사이클에 진입했고, 이 같은 기조는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20일 트럼프 당선인 취임, 28∼29일 미 FOMC 결과 등을 보고 금리 결정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금리 인하 실기론 ‘논란’
한은의 금리 동결 결정에 대해 전문가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경기 부양보다 환율 안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금리 인하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은이 정부에 추가경정예산(추경)을 요구할 정도로 경기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정작 내수 한파 해결에는 손을 놓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외적 정치·경제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선제적 금리 인하를 통해 시장에 변동성을 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반면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한은이 금리 동결을 결정하면서 경기 부양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7, 8월에 이어 또다시 금리 인하 ‘실기론’이 불거지자, 이 총재는 “1년 뒤 평가하라”라고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이 총재는 “통화 정책은 경기와 물가만 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통화 정책은 모든 변수를 균형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게 바람직하고, 누군가는 그런 균형을 잡아주는 게 한국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
이동훈 기자 dh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