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산유국이 오는 4월부터 원유 증산에 나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원유 수요 둔화 우려에도 원유 공급량을 늘리는 것이다. 이 여파로 국제유가는 3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OPEC+의 이번 결정이 시장 상황이 아닌 트럼프 대통령의 '유가 인하' 압박에 따른 것이라고 짚었다.
3일(현지시간) 로이터·블룸버그통신·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으로 구성된 OPEC+는 이날 화상회의를 통해 예정대로 오는 4월1일부터 원유 생산량 증가에 나설 것이라고 발표했다. OPEC+는 내달부터 하루 13만8000배럴 증산을 시작해 증산량을 2026년까지 하루 220만배럴까지 점진적으로 회복할 계획이다.
다만 OPEC+는 성명에서 "이 점진적 증가는 시장 상황에 따라 일시 중단되거나 뒤바뀔 수 있다"면서 "이런 유연성을 통해 원유 시작 안정성을 계속 지원할 수 있다"고 변화 여지를 뒀다.
OPEC+가 이날 발표한 증산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카자흐스탄, 알제리, 오만 등 8개국이 참여하는 자발적 감산 2단계의 종료 수순 시작을 의미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2022년부터 시작된 OPEC+의 감산에는 회원국 전체가 참여하는 하루 200만배럴의 감산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 8개국이 참여하는 자발적 감산이 있다. 자발적 감산은 1단계(하루 165만배럴)와 2단계(하루 220만배럴)로 나눠진다. 이를 통해 OPEC+는 그간 전 세계 공급량의 약 5.7%에 해당하는 하루 585만배럴의 감산을 진행해 왔다.
팬데믹 종료 후 원유 수요 회복, 고유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등을 이유로 OPEC+의 감산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하지만 원유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산유국들은 계속 감산 추세를 이어왔다. 지난해 12월 OPEC+는 공식 감산과 자발적 감산 1단계 종료 돌입 시점을 올해에서 내년(2026년)으로, 자발적 감산 2단계 종료는 올해 1월에서 4월로 미뤘다.
FT는 "OPEC+는 당초 지난해 9월부터 생산량 감축 종료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이를 3차례나 연기했고, 시장은 이번에도 감산 종료 시점이 미뤄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장의 이런 예상을 깨고 OPEC+는 기존 계획대로 4월부터 자발적 감산 2단계를 끝내고 증산에 나설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OPEC+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바클레이스의 아마프리트 싱 분석가는 이날 투자 메모에서 OPEC+의 증산 시행에 대해 "놀라운 일"이라며 "OPEC+의 이번 결정은 시장 수요에 대한 대응이 아닌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압력 증가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화상 연설에서 사우디 등 주요 산유국의 산유량 감산으로 국제유가가 오르고, 이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며 OPEC에 유가 인하를 촉구했다.
한편 시장 예상을 빗나간 OPEC+의 발표에 국제유가는 3개월 만의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뉴욕상업거래소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전 거래일 대비 배럴당 1.39달러(2.0%) 하락한 68.37달러로 지난해 12월9일 이후 종가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브렌트유도 1.19달러(1.6%) 떨어진 배럴당 71.62달러로 지난해 12월6일 이후 가장 낮았다.
미즈호 증권의 밥 야거 에너지 선물 담당 이사는 "유가는 OPEC+의 (증산) 결정, 미국 제조업 데이터, 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 회담, 미국의 관세 등 여러 전선에서 공격받고 있다"며 유가 하락 배경을 설명했다. 원유 시장 투자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로 세계 경제성장이 둔화해 원유 수요도 줄어들 것을 우려한다.
머니투데이 정혜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