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제조업 부흥”, 韓 산단은 쇠락
건설-유통업 부진 직격탄에… 산단 30%, 작년 생산-수출 감소
인프라 열악해 신입 채용도 어려워
정부, 올초 해결案 마련하려 했지만… 계엄 정국에 동력 잃고 정책 표류
산단 노후화 겹쳐 특단 대책 시급
경기 남양주 광릉테크노밸리 내 건설 자재 제조 업체 A사. 20여 년의 업력에 약 1만6000m² 규모의 넓은 공장을 보유한 곳이지만 현재 일하는 직원은 30여 명에 불과했다. 건설 경기 침체 장기화로 200억 원 수준이던 연 매출이 3, 4년 만에 100억 원대 초반으로 줄면서 인력이 40% 가까이 감소했다.
직원 평균 연령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인 직원 15명이 대부분 50대일 정도다. 지난해 여름 신입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공고를 내보기도 했지만 열악한 인프라로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A사 창업주의 아들인 김모 부장(35)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활력을 가져다줄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매출만 야금야금 줄어드는 구조라면 10년 뒤에는 회사 운영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국 제조업의 뿌리인 산업단지의 불황이 깊어지면서 ‘한국판 러스트벨트(rust belt·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로 전락하는 곳이 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산단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근본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계엄 및 탄핵 정국과 맞물리면서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비롯한 각국이 제조업 부흥에 나선 상황에서 우리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기약 없이 지연된 산단 활성화 대책
20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국내 산단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하반기(7∼12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담당 부처 실국과장들이 직접 지방 위주로 현장을 둘러보면서 문제점을 파악해 왔고, 올해 초에는 해결책을 담은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연초 발표한 ‘2025년도 업무계획’에서 관련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책 발표 시기도 기약 없이 밀린 것으로 파악됐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현장의 얘기를 조금 더 모아보자는 차원”이라며 “산단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재원도 어마어마하게 들고, 손을 댈 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현장 조사를 좀 더 해서 제대로 준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계엄 및 탄핵 정국에 정부 부처에서 추진하던 주요 정책이 동력을 잃고 표류하면서 산단 활성화 대책도 흐지부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 산단 10곳 중 3곳, 생산·수출액 ‘후퇴’
문제는 국내 산단이 겪는 어려움이 여유를 부릴 정도로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동아일보가 한국산업단지공단의 ‘산업단지 현황 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최근 2년(2023∼2024년)간 한 번이라도 생산 실적이 잡힌 국내 산단 857곳 중 지난해 3분기(7∼9월) 누계 생산액이 전년보다 증가한 곳은 347곳(40.5%)에 그쳤다. 250곳(29.2%)은 누계 생산액이 오히려 후퇴했고, 260곳(30.3%)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는 건설·유통업 부진의 영향이 크다. 산업부 관계자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정리를 지지부진하게 끌고 온 탓에 좀처럼 지방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며 “유통 쪽은 중국 온라인 유통 업체의 저가 물량 공세에 밀리면서 무너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달성한 6838억 달러의 역대 최대 수출 실적도 낙수효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2년간 한 해라도 수출 실적이 잡힌 산단 712곳 중 지난해 3분기 누계 수출액이 전년 대비 증가한 곳은 260개(36.5%)에 불과했다. 235곳(33.0%)에서는 오히려 수출이 감소했다.
● 산단 노후화까지 ‘겹악재’… “특단 대책 시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단 노후화까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 산단 5곳 중 2곳 이상은 착공 후 20년이 지난 상태다. 산단 활성화의 최우선 과제인 젊은 인력 충원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정부 지원책 역시 대부분 ‘보여주기’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문화 산단을 만들겠다며 수억 원을 투입해 겨우 벽화 거리를 조성하는가 하면 접근성 고려 없이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대형 주차장을 건설해 예산을 낭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산단 정책을 송두리째 바꾸는 정도의 획기적인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내 산단의 쇠락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동안 정부의 산단 대책은 100의 예산을 전국 1000여 개의 산단에 고루 나눠주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며 “회복 가능성이 없는 산단은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고, 첨단 기업이 몰려 있는 산단에 지원을 집중하는 형태로 정부의 정책 방향을 재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종=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