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전임 바이든 정부가 도입한 '전기차 의무화' 정책의 폐기를 공언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는 상·하원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즉각적인 폐기는 어렵지만 '불공정한 보조금' 폐지 검토를 지시해 한국 자동차·배터리 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21일 백악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에너지의 해방'이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에서 "저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와 천연자원"의 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 정책 중 하나로 전기차 의무화 폐지를 명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기차를 다른 기술보다 우대하고 다른 종류의 자동차를 너무 비싸게 만들어 개인, 민간 기업, 정부 단체의 전기차 구매를 사실상 의무화하는 불공정한 보조금과 기타 잘못되고 정부가 강요하는 시장 왜곡의 폐지에 대한 검토"를 명시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정부 부처에 IRA와 인프라법에 따라 책정한 자금의 지출을 즉각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중단 대상에는 전기차 충전소용 자금도 포함된다. IRA의 전면 폐지는 의회를 통해서만 가능해 폐지보다는 세부규정을 손대 보조금 대건을 대폭 변경하겠다는 의도다.
또 행정명령에는 내연 기관차의 판매를 제한하는 주 정부의 배출 규제를 적절한 경우 폐지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 2030년까지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신차의 50%를 전기차로 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바이든 전 대통령의 행정명령도 폐기했다.
국내 자동차와 배터리 기업들은 이번 행정명령에 따라 IRA에 따른 혜택을 대폭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IRA의 대표적인 세부규정인 '30D(친환경차 세액공제)'의 폐지를 유력하게 보고 있다. 30D는 미국에서 전기차를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에게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 혜택이다.
'45X(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에 해당하는 AMPC 존속 여부에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AMPC는 투자기업에 대해 배터리셀은 ㎾h(킬로와트시)당 35달러, 모듈은 ㎾h당 10달러를 환급하는 제도로,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은 이 제도에 따라 분기마다 최대 수천억 원의 혜택을 받았다. 해외우려기업(FEOC)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도 국내 기업에는 악재다. 한중 합작법인(JV)을 운영하는 한국 배터리 관련 기업에 리스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번 행정명령 모두 글로벌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 전기차 확산 속도가 둔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일부 주의 배출 규제 완화로 내연기관차 판매가 늘어나면 내연기관 모델을 보유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도 있지만 친환경차에 투자해온 국내 자동차와 배터리업계에는 전략 재조정이 불가피한 것이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전기차 의무화 폐지는 예상했던 만큼, 향후 IRA 축소나 폐기까지 여파 최소화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미국 조지아주의 전기차 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 126억달러를 투자한 만큼 해당 공장에서 하이브리드차 생산을 병행하고 올해 내 생산량을 연간 50만대까지 늘릴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IRA 폐기와 함께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주요 생산거점이 있는 멕시코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향후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 등을 거쳐 향후 외국 기업에게 이뤄질 관세 부담을 완화시킬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관세를 5%에서 25%로 올린다고 했다가 현대차그룹이 공장 설립을 약속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예외 조항을 끌어다가 낮춰준 바 있다"며 "현대차가 트럼프 취임식 때 100만달러를 기부하는 등 친트럼프 전략을 펼치고 있는데, 추후 투자나 공장 설립을 약속해 관세 부과에서 회피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도 미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중국 공급망 의존도를 빠르게 줄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1기 당시 미중 무역전쟁의 홍역을 치렀던 만큼 향후 보호무역 기조 강화 가능성을 고려할 때 장기적인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구자민 커빙턴앤벌링 조세전문 변호사는 "AMPC 혜택은 유지될 것이란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지만 조항 변경으로 전기차 수요가 줄면 전기차와 배터리 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한국기업들에게 유리하게 규정이 적용되도록 각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미국 주의회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한나·임주희기자
19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워싱턴 D.C. 국립 건축 박물관에서 열린 촛불 만찬에서 멜라니아 트럼프와 함께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한나 기자(park27@dt.co.kr)
임주희 기자(ju2@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