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철강 등 현지화 속도
배터리 등 보조금 못받을 수도
정부도 비상...대책마련 나서
취임식 행사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미국발 관세 폭풍’이 국내 산업에 현실로 다가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취임과 동시에 2월 1일부터 멕시코·캐나다산 수입품에 25% 관세 부과 의지를 밝혔고, 기존 무역협정 재검토도 지시했다. 모든 국가에 15%의 보편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미국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기업들로서는 치밀한 생존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자동차 업계는 멕시코·캐나다 관세, 보편관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가능성에 3중으로 노출돼 있다.
기아는 지난해 멕시코 공장에서 만들어 미국으로 수출한 차량이 11월 말까지 13만대에 이른다.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한국에서 만들어 미국에 수출한 차량 대수가 각각 58만대, 35만대에 달한다. 한국GM도 지난해 약 42만대의 차량을 미국으로 수출했다.
기아 [사진 = 기아]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한국산 수출 차량에 보편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 내 판매가격이 올라가면서 현지 판매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정부와 협력해 보편관세를 피할 방법을 강구함과 동시에 미국 현지 생산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주도로 한미 FTA를 개정할 경우 관세 재부과로 인해 한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 가격도 상승하게 된다.
장기 부진에 빠진 한국 철강 업계는 미국의 철강 수입쿼터와 관세폭탄을 넘기 위해 생산시설을 미국에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미국 남부에 전기로 방식의 제철소 건설을 검토 중이다. 현대차·기아 현지 공장에 공급하는 자동차용 강판을 미국 내에서 생산·공급하기 위해서다.
포스코 [사진 = 연합뉴스]
포스코그룹 역시 미국 현지에서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시설을 갖추는 것을 검토 중이고, 세아그룹은 텍사스주에 연산 6000t 규모의 특수합금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보조금이 폐지될 경우 배터리 업계가 큰 부담을 떠안게 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경에 대비해 팀을 꾸리고 관련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상태”라며 “최대한 보수적인 관점에서 유연하게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책에 따라 미국 현지의 배터리 생산 용량 조정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배터리산업협회 관계자는 “배터리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국내 기업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와 함께 힘을 합쳐 대응에 나설 방침”이라고 밝혔다.
[사진 = 연합뉴스]
반도체 업계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미국 내 공장을 만드는 반도체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일부 수정되거나 취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상무부는 앞서 삼성전자에 47억4500만달러, SK하이닉스에 4억5800만달러를 각각 지급하기로 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해당 법안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태양광 에너지 산업은 다행히 중립적이다. 취임 첫날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 탈퇴에 서명한 것은 친환경에너지 업체 전반에 악영향을 준다. 반면 동남아시아를 통해 미국으로 우회 수출을 하던 중국 기업들의 수출길이 막히면 한국 업체들의 시장 확대가 기대된다.
조선 업계는 미국 해군 함정 수리 시장과 상선 건조 시장을 중심으로 새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조선 업계는 미국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수주를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두 척의 계약을 따냈고, HD현대중공업도 오는 2월부터 수주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시장에서 예상하는 미국 MRO 시장 규모는 연간 20조원에 달한다.
양주영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장은 “한국은 미국산 수입품 대부분에 관세를 거의 부과하지 않고 있는 반면 베트남, 일본 등은 품목에 따라 미국산 수입품에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며 “이런 점을 강조해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최대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이날 민관합동 대책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미국의 무역적자 조사, 무역협정 재검토 등 주요 조치별 대책을 중점 논의했다.
마이클 비먼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보는 이날 한국무역협회가 개최한 세계무역포럼에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이 당분간 멕시코와의 협정을 먼저 진행할 것”이라며 “이후에 추가 협상을 통해 예고한 관세율 25%보다 낮은 10% 수준으로 관세를 실효적으로 부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관세를 아예 부과하지 않기는 어렵겠지만 25%보다는 낮은 관세로 협상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동은 기자(bridge@mk.co.kr),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조윤희 기자(choyh@mk.co.kr), 신유경 기자(softsu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