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에너지 비상사태 선포
20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대통령이 워싱턴 DC '캐피털 원 아레나' 경기장 무대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행정명령에 무더기로 서명한 뒤 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의 뒤에는 J D 밴스(가운데) 부통령이 서 있다. 이날 제47대 대통령에 오른 트럼프는 취임식을 마치고 지지자 2만명이 모인 이곳을 찾아 불법 이주 차단, 연방 공무원 신규 고용 중지와 대면 업무 복귀, 파리 기후협약 탈퇴 등에 관한 문서에 대거 서명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0일(현지 시각) 취임과 함께 ‘에너지 패권(energy dominance)’ 정책을 본격화했다. 앞서 예고했던 대로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national energy emergency)’를 선포하고, “석유·가스 시추와 생산을 확대하고, 에너지 가격을 낮춰 다시 제조업 강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연방 정부의 ‘에너지 비상사태’ 선포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직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파리협정에서도 재탈퇴했다. 파리협정은 선진국에만 부과했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유엔 가입국 모두에게 확대한 국제 약속이다. 미국은 트럼프 1기 때 탈퇴했다가 2021년 바이든 정부 출범 후 복귀했으나, 다시 탈퇴하게 됐다. 화석연료를 중심으로 한 각종 정책이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에너지 비상사태 아래에서 의회를 거치지 않고 잇따라 쏟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블룸버그는 이날 “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대통령은 최대 150개 특별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그래픽=양인성
제조업 강국, 부유한 국가 재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취임식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에너지 탐사와 생산을 확대하고, 전임 바이든 정부의 각종 행정명령을 취소하는 ‘미국 에너지의 해방(UNLEASHING AMERICAN ENERGY)’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저렴한 에너지 공급과 이를 통한 제조업 강국 재건, 에너지 수출 등을 통한 ‘에너지 패권’ 정책을 공식화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은 다시 제조업 강국이 될 것”이라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백악관은 이날 자동차, 샤워기, 변기, 세탁기, 전구, 식기세척기 등을 열거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에너지 정책이 미국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저렴한 에너지 가격을 바탕으로 한 미국 현지 생산 확대를 강조한 것이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발 아래 있는 ‘액체 금(liquid gold·석유와 가스)’으로 다시 부유한 국가가 될 것”이라며 석유·천연가스의 생산과 수출 확대를 통해 부강한 미국을 만들겠다는 정책 방향도 분명히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파리 기후변화 협정 탈퇴 및 유엔에 보낼 탈퇴 서한에 서명한 데 이어 풍력발전용 토지·수역 임대 중단, 광물 채굴·가공 규제 완화 등 ‘트럼프표 조치’도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풍력발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것은 가장 비싼 에너지이고 게다가 모두 중국산”이라고 말했다. 노후 석탄 화력발전소와 원전 가동 확대를 비롯해 송전망과 가스관 신설, LNG(액화천연가스) 신규 수출 허가 재개도 예상된다.
세계 최대 원유, 가스 생산국
AI(인공지능)의 확산에 따라 세계 전력 수요가 급격하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세계 최대 원유·천연가스 생산국 지위를 중국과의 대결 구도에서 활용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백악관은 이날 행정명령에서 “미국은 풍부한 에너지와 천연자원이 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이념에 치우친 규제로 자원 개발과 저렴한 전기 생산이 제한되면서 일자리가 줄고, 에너지 비용이 치솟았다”며 도입 배경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열린 ‘매가(MAGA)’ 집회에서 “우리는 지금의 두 배,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비상 권한을 사용해 대형 공장과, AI 시설을 건설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고, 더그 버검 미 내무부 장관도 지난 16일 “기본적인 전기 공급이 없으면 중국과의 AI 경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규 발전소 건설과 이를 수요지와 잇는 대규모 송전망 사업을 두고,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VA) 사업’에 비견될 만한 대규모 에너지 사업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비상사태 아래에선 각 부처 장관이 의회의 관여 없이 정책을 곧바로 시행할 수 있다”며 “중국을 이기기 위해선 화석연료 확대가 필수라는 판단 아래 취임 첫날부터 드라이브를 거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재희 기자 joyjay@chosun.com
조재현 기자 jb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