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문제 삼는 對美 무역 흑자 분석
출범 나흘째를 맞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화두 중 하나는 ‘무역적자 해소’다. 실제로 출범과 동시에 미국의 무역적자국인 멕시코, 캐나다와 중국에 순차적으로 ‘관세 폭탄’이 예고됐고, 아직 구체적인 거론은 없었지만 전문가들은 한국도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2023년 기준 미국의 8대 무역적자국이다.
그래픽=양진경
하지만 23일 한국무역협회의 ‘대미 가공단계별 수출’ 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수출액 1277억8600만달러 가운데 절반이 넘는 653억9900만달러(51.2%)가 중간재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간재(中間財)는 반도체, 자동차 부품, 철강 등 다른 제품 생산을 위해 투입되는 재화다. 미국 제조업체나 현지에 생산 거점을 세운 한국 기업 등에 수출된다.
즉 한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핵심인 제조업 부흥에 필수적인 부품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통상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과 필수 공급망에서 끈끈하게 연결돼 서로 ‘윈윈’ 하는 좋은 파트너라는 점과, 한국 기업들이 잇따라 미국 투자를 늘리면서 수출이 늘어나는 측면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며 협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픽=양진경
중간재 수출, MAGA의 핵심
최근 5년간 한국의 대미 수출 통계를 보면 중간재 수출은 55.4%(2020년)→57.8% →60.4%→50.1%→ 51.2%(2024년)로 늘 과반을 차지했다. 대미 수출 증가에는 중간재 수출의 확대가 늘 깔려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해 ‘14대 대미 수출 품목’을 보면 반도체(107억달러), 자동차부품(82억달러), 석유화학·철강(각 43억달러) 등 중간재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경우, 미국 기업의 전자제품 생산 거점이 있는 대만, 인도로 수출되는 물량도 많지만 상당수 첨단 반도체는 미국으로 직접 들어간다. 인공지능(AI) 서버에 들어가는 D램과 기업용 SSD(낸드로 만드는 대용량 저장장치) 등이 직접 수출된다. 이 첨단 반도체들은 미국 휼렛패커드(HP), 델(Dell), 아마존웹서비스(AWS) 등이 주요 고객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에서 직접 공개한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서도 한국의 반도체는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AI, 소프트뱅크, 오러클 등 3사가 합작으로 미국 내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등을 짓고, 범용 인공지능(AGI)을 개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전기차 등 미국 주요 산업의 핵심 부품으로 미 제조업의 활성화와 첨단 기술 산업 경쟁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면서 “특히 AI와 클라우드 컴퓨팅 등 트럼프 정부가 강조하는 미래 산업의 핵심 기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동차 부품 업계의 대미 수출 확대 역시 미국 완성차 업체들의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HL만도의 경우, 미국 ‘빅3’인 포드와 GM(제너럴모터스), 북미 최대 전기차 업체 A사 등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완성차다. 지난 2017년만 해도 북미 완성차 업체 매출 비중이 18%였는데, 2023년에는 29%로 증가했다. 국내 한 중견 부품업체인 B사도 현재 북미 최대 완성차 업체와 루시드에 납품하고 있고, 리비안과 포드 등에도 순차적으로 납품이 계약돼 있다. 차 부품 업계 관계자는 “공급망 다변화 차원에서 많은 업체들이 테슬라 등이 형성한 미국 전기차 부품 시장을 공략한 결과”라고 했다.
현지 공장 지으며 설비 수출도 영향
또 하나의 요인은 미국에 신공장을 짓거나, 기존 거점을 확장하는 투자가 늘면서 이 과정에서 각종 설비·부품들의 수출 역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첨단제조 기업들이 미국에 수십조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미국으로의 수출액 역시 덩달아 늘었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집계된 한국의 해외 투자액 가운데 대미 투자는 162억7300만달러로 전체의 35%를 차지했다. 한국의 대미 투자 비율은 2018년에는 21.7%였지만, 이후 꾸준히 증가해 2023년에는 43%를 차지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공급만 끈끈하게 연결 서로 ‘윈윈’하는 파트너”
이차전지의 경우 국내 배터리 3사가 미국에 조 단위 투자를 하면서 현지 공장을 조성, 가동하기 위해 한국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대미 수출이 덩달아 늘어난 것이 무역수지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현지에는 배터리 생산 수율(收率·생산품 중 정상품 비율)을 단기간에 잡을 수 있는 소부장 생태계가 없기 때문에, 한국 협력사의 주요 부품·장비를 미국으로 반입하는 것이 ‘수출’로 잡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터리 부품·장비들은 제일엠앤에스(경남 김해), 한화모멘텀(경남 창원), 필에너지(경기 오산시), 원익피앤이(경기 평택) 등의 기업이 국내 공장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대미 수출에서 ‘관계사 간 거래’ 비율이 높다는 것도 이 같은 투자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한국무역협회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수출 가운데 관계사 간 거래 비율은 2015년 이후 꾸준히 60% 안팎을 기록하고 있고 지난해에도 58%를 차지했다. 미 관세법에 따르면,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의 지분율 5%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관계사에 해당한다. 무역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대미 수출은 미국 투자에 필요한 설비나 건설용 장비를 판매하고, 미국 내 생산을 위해 소재·부품을 수출하는 등 관계사 간 거래 비율이 높다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박순찬 기자 ideachan@chosun.com
이정구 기자 jglee@chosun.com
이영관 기자 ykw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