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파운드리업체(반도체 위탁생산) TSMC가 미국에 1000억달러(약 146조원)를 추가 투자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에 수입되는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를 예고한 가운데 친(親)트럼프 정책 행보에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TSMC의 한발 빠른 결정에 삼성전자도 글로벌 전략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은 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한 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TSMC의 신규 투자는 애리조나주에 5개의 생산라인을 건설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며 "수천개의 고임금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인공지능(AI) 반도체가 바로 이곳 미국에서 만들어질 것"이라며 "이것은 경제 안보는 물론 국가 안보의 문제"라고 말했다.
TSMC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이던 2020년에도 12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생산라인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가 투자 규모를 650억달러로 확대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 후 기존 투자액을 훌쩍 뛰어넘는 10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하면서 TSMC의 대미 투자 총액은 1650억달러로 늘었다. 반도체업계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실적이 무색할 정도의 투자 유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과 TSMC 모두에 엄청난 일"이라며 웨이저자 회장에 대해서도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TSMC는 추가 투자금으로 파운드리 생산라인 3개와 패키징 라인 및 연구개발센터 2개를 건설할 계획이다. TSMC는 지난해부터 애리조나 생산라인에서 양산을 시작한 상태다.
TSMC의 깜짝 투자 발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반도체에는 1997년 미국 주도로 발효된 정부기술협정(ITA)에 따라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게 관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한 뒤 반도체에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도 "반도체를 대만에서 만들고 미국으로 보낸다면 25%나 30%, 50% 등 수치가 어찌 되든 관세를 부과받게 될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웨이 회장은 게임에서 훨씬 앞서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바이든 행정부에서 TSMC를 비롯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미국 현지에 생산라인을 짓기로 한 반도체업체에 제공하기로 한 지원금과 세제 혜택을 두고도 지난해 대선 기간 내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반도체 지원금을 지급하는 대신 수입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하면 글로벌 업체가 대미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논리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 때문에 반도체법 지원금이 취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도 지난 1월 인사청문회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을 약속할 수 없다"며 "보조금 지급을 검토해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러트닉 장관은 이날 TSMC의 투자 발표 회견에 배석해 "TSMC는 바이든 정부에서 60억달러의 보조금을 받았지만 TSMC가 이번에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것은 보조금이 아닌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때문"이라며 "관세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온 것이고 지금 여러분은 트럼프 대통령의 힘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TSMC가 전격적으로 대규모 대미 투자를 발표하면서 반도체업계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했던대로 보조금을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대규모 해외기업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더 투자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후 글로벌 대기업의 대미 투자 발표 규모는 1조달러가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애플이 최근 미국에 5000억달러를 투자해 서버 제조 설비를 만들겠다고 발표했고 오픈AI·소프트뱅크·오라클은 5000억달러를 투자해 데이터센터를 미국 전역에 건설하기로 했다. 이날 TSMC가 10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한 데 앞서 메타는 지난달 650억달러 규모의 미국 현지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밝혔다.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